brunch

고전을 읽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by 만재소녀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과 비문학 중에 비문학을 더 좋아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소설 등장인물의 이름을 외우지 못했다. 이 사람이 저 사람 같고 저 사람이 이 사람 같았다. 현실에서 사람 얼굴은 쉽게 외워도 이름은 계속 까먹는 성향이 독서에도 이어졌다. 그래서 늘 비문학을 읽었다. 책을 읽을 때도 소설을 읽지 않았다. 그나마 읽을 수 있는 경우는 서술 시점이 1인칭 주인공일 때다. 본인 이야기를 하니까 등장인물이 제한적이다. 이 정도로 소설을 읽을 수 있는 역량이 부족했다.


고전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내용이 어려울 것이라는 두려움도 한 몫했다. 하지만 가장 큰 두려움은 이름 자체를 외우지 못해 흐름조차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는 마음이 더 컸다. 그러다 최근 독서모임에서 몇 권의 소설을 읽었다. 역시나 어려웠다. 어느 순간 언제까지고 비문학만 읽은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방법을 바꾸어봤다. 눈으로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방법이 원래의 독서법이었다면 머릿속에 구조를 그렸다. 등장인물이 나올 때마다 한 번씩 관계를 정리했다. 그렇게 소설 읽는 법을 조금씩 익혔더니 욕심이 생겼다. 고전을 읽고 싶어 졌다.


책꽂이에 늘 있었지만 선뜻 손에 잡지 못한 책이 한 권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의 작품이다. 제목이 나를 사로잡았다. 존재의 가벼움이라니,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 중에 존재의 무거움에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가벼움이 더 논하기 쉬울 것이다. 다들 가벼운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내 존재가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삶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흔치 않다. 한 줄의 제목으로 현대 사회를 보여줬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내 존재를 돌아보게 했다. 그래서 나는 늘 이 책이 읽고 싶었다.


책 첫 장은 니체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역시나, 고전은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어려우니 고전이구나, 했다. 하지만 다음 페이지부터는 조금 달랐다. 현대 소설은 아니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등장인물도 그리 많지 않아 관계를 쉽게 정리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두 관계가 나오고 장 별로 이야기가 왔다 갔다 한다. 이름을 외지 못하는 나이지만 흐름을 따라가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다. 심지어 가장 어렵다고 느낀 전지적 작가 시점인데도 흐름을 따라갈 수 있었다. 다만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철학을 논하는 페이지가 나오면 몇 번씩 생각하며 읽어야 했다.



KakaoTalk_Photo_2019-10-14-21-53-22.jpeg



책에 이만큼이나 빠져든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마지막 장을 덮은 지 벌써 며칠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마음과 머릿속에 내용이 맴돈다. 아니, 등장인물이 머릿속에 계속 걸어 다닌다. 등장인물에게서 나를 봤다.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그 속에 삶이 녹아있기 때문이었다.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생각, 그리고 타인의 관계에서 나를 본다. 책에서 말하는 그들의 심리 기제는 나의 그것과 같다. 그래서 나를 이해하게 된다. 아, 내가 이런 이유로 그런 행동을 하는 거구나 하고.


책을 읽다 몇 번이나 숨을 고르 쉬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숨을 멎게 하고 하늘을 바라보게 했다. 책이 나에게 주는 순간에 매료되어 버린 거다. 소설 속 삶에서 나의 과거와 현재를 봤다. 내 인생의 토마시, 테레자, 그리고 사비나와 프란츠를 생각한다. 그들 존재의 가벼움이 아닌 내 인생의 가벼움, 내 삶을 이룬 사건들의 가벼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책을 읽지만 되려 책이 나를 읽었다. 사람들이 고전을 읽는 이유를 그리고 고전이 왜 고전인지를 알게 되었다.


"테레자에게 책이란 은밀한 동지애를 확인하는 암호였다. 그녀를 둘러싼 저속한 세계에 대항하는 그녀의 유일한 무기는 시립 도서관에서 빌려오는 책뿐이었다."
"필연과는 달리 우연에는 이런 주술적 힘이 있다. 하나의 사랑이 잊히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첫 순간부터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만 한다."




오늘부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기 시작했다. 책을 구매한 순간부터 설렜다. 이 책은 나에게 어떤 감동을 줄까, 어떤 구절로 나의 숨을 멎게 할까. 기대가 된다. 고전을 읽는다. 고전 속에서 나를 보고 삶을 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집 밖을 나서며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