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차이나’의 질주, 갑자기 멈춘 이유
한동안 ‘멈추지 않는 성장 열차’처럼 달리던 인도 증시가 최근 들어 숨 고르기에 들어갔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포스트 차이나’로 불린 인도는, 제조업·IT·소비 시장 모두에서 잠재력이 큰 나라로 꼽혔습니다. 국내에서도 인도 관련 펀드가 잇따라 출시되며 개인·기관 투자자 모두에게 매력적인 투자처로 자리잡았습니다.
미래에셋, 삼성증권 등 주요 증권사들이 내놓은 인도 펀드는 출시 후 꾸준한 수익률을 기록했고, 덩달아 “인도에 투자해도 될까요?”라는 질문이 부쩍 늘었습니다. 하지만 그 뜨거운 분위기가 단 몇 주 만에 이렇게 변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요.
지난 7월 한 달 동안 외국인 투자자(FPI)는 약 ₹17,741 Crore 규모의 주식을 순매도했습니다.
이 수치는 약 2조8천억 원에 달하며, 단일 월 기준으로도 상당히 큰 규모입니다.
8월에도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아, 12일 기준으로 ₹17,924 Crore가 추가로 빠져나갔습니다.
이 두 달간 외국인 자금 유출 총액만 5조 원에 가깝습니다. 특히 IT 업종에서만 1조9천억 루피 이상이 빠져나갔고, 금융·부동산·자동차 등 주력 산업 전반에서 매도세가 이어졌습니다. 인도의 대표 주가지수 Nifty와 Sensex는 약세 흐름을 지속했고, 특히 루피화 환율은 달러당 87.7루피 선까지 하락해 역사적 저점을 기록했습니다. 단순한 일시 조정일까요, 아니면 구조적인 변화의 전조일까요?
이번 조정의 가장 직접적인 촉매제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관세 폭탄’입니다. 미국은 일부 인도산 수출품에 기존 25% 관세에 추가 25%를 더해 총 50% 관세를 부과했습니다. 이 조치는 미국·인도 간 무역 갈등을 단숨에 격화시켰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 EU가 15% 안팎에서 타협점을 찾은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8월 12일 현재까지 인도는 협상 타결에 이르지 못했고, 그 사이 외국인 투자심리는 급속히 위축됐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표면적으로 무역 불균형 해소와 미국 제조업 보호를 내세웠지만, 시장에서는 인도의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문제 삼은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지금 우리는 인도의 대외 정책 기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도의 외교를 얘기할 때 모디 정부의 외교 수장인 수브라마냠 자이샹카르 외교장관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55년 뉴델리 외교관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델리대와 자와할랄네루대(JNU)에서 국제관계학 석·박사를 마쳤고, 1977년 인도 외교부(IFS)에 입부했습니다. 이후 주미·주중 대사, 외교차관 등을 거치며 굵직한 외교 현장을 경험한 정통 외교 엘리트 출신입니다. 그가 내세운 핵심 원칙은 ‘전략적 자율성’에 기반한 실용외교(pragmatic diplomacy) 입니다.
쉽게 말해, 인도에 득이 되면 누구와도 거래하고, 손해가 된다면 그 어떤 요구도 거절한다는 것이죠.
이 원칙은 인도가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주요 강대국들과 동시에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의 외교 정책은 그가 저술한 저서 "Why Bharat Matter"에서 자세히 저술되어 있습니다.
실용주의 정책의 끝판왕이라고 할수 있고 발간 즉시 큰 호응을 얻었지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바이든 정부는 러시아에 대한 전방위 제재를 추진했습니다.
동맹국들에게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중단하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도는 러시아산 원유를 배럴당 10~15달러 저렴하게, 그것도 루피화로 대량 구매했습니다.
2019년 1.7%에 불과했던 러시아산 원유 비중은 현재 40%까지 치솟았습니다. 전쟁 이후 인도가 수입한 러시아산 원유 규모는 약 112억 유로에 달합니다. 국제사회에서 “러시아를 돕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지만, 자이샹카르 장관은 단호했습니다. 지금도 계속 구매하겠다라는 얘기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더 좋은 조건이 있으면 당신에게 사겠다(Do you have better deal?)”
이 단호한 한마디가 인도의 외교 스타일을 잘 보여줍니다. 이 덕분에 인도는 안정적인 원유 공급망을 확보했고, 최대 정유사 릴라이언스는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기류가 달라졌습니다. 그는 인도의 러시아산 원유 거래를 “전쟁 자금 지원”이라고 규정하며 강도 높은 비판을 이어갔습니다. 심지어 일부 발언에서는 인도를 ‘Dead Economy’라고 지칭하며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미국 입장에서 인도와의 교역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 압박 수단으로 관세를 선택한 셈입니다. 이에 모디 총리와 인도 정치권은 즉각 반격에 나섰습니다.
불합리한 관세에 맞서겠다고 선언하며, ‘Make in India’ 강화, 기술 투자 확대, 자국 제품 소비 독려 등 애국심을 자극하는 메시지를 연일 내놓고 있습니다. 6월에는 철강 수입 제한을 위한 세이프가드 조치를 고시했고, QCO(품질관리명령) 제도를 통해 수입재 통관을 까다롭게 하는 등 보호무역 성격을 강화했습니다.
혹시 이런 정책들이 단기적으로는 투자심리에 부담이 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인도 제조업을 지탱하는 기반이 될 수 있을까요?
흥미로운 점은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가는 동안 국내 자금은 오히려 유입됐다는 사실입니다.
7월 인도 주식형 뮤추얼펀드에는 ₹42,702 Crore(약 4조9천억 원)가 순유입되며 53개월 연속 순유입 기록을 세웠습니다. 특히 중소형·소형주 펀드가 강세를 보이며, 국내 투자자들의 저력이 다시 한번 입증됐습니다. 이는 인도 증시가 단순히 외국인 자금의 흐름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갈등이 장기화된다면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인도를 바라보는 국제 시각에도 변화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와 외교는 언제나 타협의 여지가 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양국이 결국 합의점을 찾고 인도가 다시 성장 곡선을 그릴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연 7%대 성장세, 일본을 제치고 세계 3위 경제대국으로 도약할 것이라는 전망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나라가 인도와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앞으로 몇 주, 혹은 몇 달간 이 상황을 지켜보는 일은 꽤 흥미로울 것입니다.
혹시 이 조정이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