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막힌 쉽지 않은 입국
인도에 가기로 결정은 되었지만, 주변 환경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예전처럼 회사에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거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우선 비행기가 제대로 뜰지 불분명했다. 당시에는 코로나로 인해 모든 정기선은 취소되었고, 도착지 정부의 승인만 받은 ‘전세기’만 허용이 되었다. 전세기를 예약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허가를 받았는지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고역이었다.
전세기를 신청한 사람들이 모인 그룹채팅에는 “비행기 정말 뜨나요? 지방에서 올라와서 꼭 알아야 합니다”라는 질문이 쇄도했다.
“저희도 확신은 드릴 수 없고 기다려봐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예정되었던 출발 당일이 되었지만 비행기가 운항될 거라는 소식은 없었다. 집에서 짐만 싸놓고 기다리다, 일단 어찌 될지 모르니 공항으로 출발하기로 하였는데 그러던 찰나, 운항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이틀 후 다시 출발하니 기다려달라는 메시지와 함께.
규정상 72시간 전에 받은 코로나검사 (RT-PCR) 결과를 제출하는 것이 의무였는데, 이틀 후 출발이니 다시 검사를 받아야 했다. 줄이 끝도 없는 병원에 다시 갈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코로나 시절 필수인 마스크도 개수 제한이 있었다. 마스크 품절 대란 때문인지 출국 시 현지 체류일 근거하여 마스크 허용 개수가 있었다. 4개월 이상 체류 시에는 150개까지 가능하다고 하였다.
인도에는 마스크도 없다는 루머가 팽배했다. (막상 가보니 그러지 않았지만....) 그래서인지 150개 가지고는 안될 거 같았다. 설마 걸리지는 않겠지라는 마음과 함께, 30개를 꾸역꾸역 추가로 챙겨 넣었다. 캐리어에 180개를 채워 넣으니 다른 물품 챙길 자리도 없었다. 아메다바드에 가면 한국 음식 없다는데, 음식을 챙기지 못해도 마스크로만 충분히 배불렀다.
동시에 인도는 코로나 상황이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후문이지만 인도 주재원은 Lock Down (락다운, 코로나 전염을 막기 인도정부가 실시한 강력한 봉쇄 정책)을 겪은 자와 겪지 않은 자로 나뉜다는 농담이지만 슬픈 얘기가 돌았다. 인도의 어마무시했던 첫 번째 락다운이 20년 5월경에 있었으니, 8월에 입국한 나는 겪지 않은 자에 속했다.
락다운 당시에는 상황이 너무 심각해 밖에 나가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고, 먹고 사는게 하루하루 이슈였다고 한다. 한국 회사에서 긴급 구호품(?) 이란 명목으로 한국 식자재를 보내온 것도 이때쯤이다. 술이 고픈 이들은 직접 포도주도 담가 먹었다는 분들도 있었다. 물론 홀로 있어 우울증을 호소하는 분들도 계셨고, 주재원 생활을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조기 복귀를 희망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슬프게도 많은 인도 사람들이 의료 지원 부족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틀 후 비행기는 다행히 사전에 허가를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코로나 방역 택시를 타고 도착한 인천공항은 마치 시골 동네 버스터미널 같이 한산하다 못해 스산했다.
우여곡절 끝에 인도 아메다바드에 도착하니 늦은 밤이되었다. 어두운 탓에 눈에 첫 풍경은 담을 수 없었지만특유의 인도 냄새는 예전 그대로였다. 그렇게 도착 후 회사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임시로 몇 달간 지낼 한국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규정상 회사에 바로 출근 할 수 없었고 현지에서 2주간격리를 추가로 해야 했다. 혹시 모를 전염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함께 일할 직원들과 인사는 나중으로 미루어야 했다. 아쉬운 대로 메일로 인사를 대신하였다.
“sir, welcome to india" 많은 직원들이 회신해 주는 메일에 이제 정말 인도에 왔다고 느껴졌다
코로나가 방해하고 있었지만, 20년 8월 구자라트 아메다바드에 도착해서 이렇게 생활이 아닌 생존(?)을 하기로 결심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