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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vittra Mar 28. 2024

인도 구자라트로 가라고요?

거기가 어디인데요?

부랴부랴 면접을 보기 위해 본사 건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느끼는 팽팽한 긴장감은 있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대기실에 가보니 세계 각지로 보내지는 주재원에 지원한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내 이름이 호명되었고, 나는 심호흡을 깊게 하고 들어갔다.


"인도로 가시면 여러 환경도 좋지 않고, 특히나 가족과 같이 가시면 가족들이 힘들어 할 수 있는데 괜찮으신가요?"


첫 번째 질문은 역시나 인도의 환경 문제였다. 수년간 인도에서 일하길 바라던 나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질문이었다. 면접관님들이 잘 모르시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델리나 뿌네, 첸나이 같은 대도시는 한국 사람도 많아서 살기에 크게 문제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호기롭게 준비된 대답을 마치고 면접실을 나왔다. 나오면서 왠지 모르게 잘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델리나 뿌네로 가면 아이들 학교는 어디로 보내고, 어떻게 지내고 등등 벌써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에 인도 쪽 주재원 자리에는 뿌네와 아메다바드에 있는데, 뿌네 쪽은 경쟁이 매우 심합니다."  누가

들어도 내가 결정한다면 아메다바드로 보내질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아메다바드? 거기가 어디더라? 예전에 대지진 난곳 아니야?" 그제야 구자라트 아메다바드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사람들에게 아메다바드에 있는 법인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이제 막 시작한 신규 법인이다, 구자라트에는 한국인도 거의 없고, 외국인을 위한 인프라도 없어서 굉장히 어려운 곳이다. 국제학교는 물론이고 술도 먹을 수 없고, 고기도 구하기 어려운 특이한 곳이라고 했다.


회사에서는 해외 주재지역을 여러 환경적인 요소에 따라 등급을 나눠 수당이나 지원금 등의 기준으로 활용하는데, 아메다바드 법인은 가장 높은 등급이라고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오지'라고 표현하며 많은 이들이 지원하기도 꺼려하는 곳이라고 얘기해 줬다.


'이런 곳이라서 나한테까지 기회가 왔나?'라는 생각도 얼뜻 들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경험하고 싶었던 인도에서 주재원으로 일하는 게 얼마나 축복받은 일이고 큰 경험이 될 것인지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려운 곳이라고 생각해 주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곤 했다.


얼마 후 주재원 부임에 대한 인사발표가 났고, 난 예상대로 구자라트로 '20년 5월 부로 발령을 받았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가족과 이제 막 3살 내기 쌍둥이를 키우는 아내에게 소식을 알렸다. 아내는 나의 모든 스토리를 알아서 인지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해주었지만, 앞으로 잠시나마 혼자 있어야 할 시간을 두려워할 것 같았다. 내가 먼저 가서 정착한 후에 아내와 아이들을 인도로 데려올 생각이어서 빨리 데려오겠다고아내를 다독였다.


착착 준비가 되어가던 시절, '20년이 되자 기억하고 싶지않은  코로나가 온 세상을 덮쳤다. 코로나는 말 그대로 세상을 마비시켰다. 출장도 금지가 되었고, 재택근무도 의무화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 주재원 복귀나 부임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아. 이번에도 이렇게 안 되는 건가?' 생각이 들었다.


약속되었던 5월, 6월이 지나도 어떻게 될건지 아무도 얘기해 주는 사람들이 없었다. 주재원 명령이 모두 취소될 수도 있다는 얘기도 들렸다. 기약도 없이 힘들게 코로나 시절을 보내던 그때, 8월이 되자 회사에서도 이제 안 되겠는지 일부 국가를 시작으로 코로나를 무릅쓰고 주재원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2000년 8월, 그렇게 나는 한국을 뒤로하고 코로나가 득실 되었던 인도 구자라트로 떠났다.


한국 음식 보다 더 중요했던 마스크를 더 많이 챙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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