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그곳으로?
복학을 했다.
인도를 한번 다녀온 터라 군대 가기 전과는 학과 공부가 다르게 느껴졌다. 관심이 생기니 공부 속도는 무지하게 빨라졌고, 날을 세워 공부해도 피곤한 줄 몰랐다.
학교에서 장학생으로 보내주는 인도 교환학생도 다녀왔고 현지에서 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델리에 ‘국립중앙힌디연구소’에서 1년간 더 공부하며 점점 인도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통역, 번역 아르바이트도 하며 많은 경험들이 더 자신 있게 만들었다.
2009년 전 후에는 인도나 BRICS 관련 언어과는 취업시장에서 인기가 많았다. 은행, 상사, 해운회사뿐 아니라 국가기관 등에 신입사원 채용 시 인도 전공자 우대라는 표현이 모집공고에 있었다.
남들은 서류 한번 붙기 어렵다는데, 나는 면접이 겹쳐서 다 못 갈 정도로 잘 붙었다. 그런데 최종 결과는 좋지 않았고, 내가 가고 싶었던 인도와 관련된 사람을 뽑는 곳에는 인연이 없었다. 이렇게 못 붙는 것도 어려운데.. 불합격자들에게 보내주는 문자에도 이제 적응이 되어 슬퍼지도 않더라.
졸업이 다가오는데 취직을 못해 조급했다. 학창 시절 내내 인도 인도만 외치었는데 현실 앞에서는 타협이
되었다. 졸업 전 어디라도 가야 했다. 마치 고등학교 때 재수하기 싫었던 것처럼.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어린 나이에 멀 그렇게 모든 것을 조급하게 생각했는가 싶다. 20대 후반 30대 초반에는 정말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생각하는 게 훨씬 중요한데 왜 그러지 못하고 늦었다고만 생각했을까? 이 부분은 모든 청년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돌이켜 보니, 늦은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조급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결국 어느 시멘트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내수 영업직으로 입사하였는데 인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이런저런 건설사 현장이나 사무실에 들러 시멘트를
파는 일이었다. 회사는 탄탄했고, 좋은 회사였지만 마음 한편에 인도에 대한 미련 때문에 정이 가지 않았다.
취직 후 모인 학과 모임에서 많은 친구들은 인도에 관련된 업무를 한다며 서로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 다음 주에 3주 동안 인도 출장 가잖아. 정말 싫어, 왜 나보고 가라는 거야?”
인도어과를 함께 졸업한 어느 한 친구는 원하지 않는 인도 업무로 스트레스받고 있었다.
‘왜 일하고 싶은 나에겐 저런 기회가 오지 않을까?’
사실 회사를 다니면서도 떠날 준비를 했다. 퇴근하면 또 입사 원서를 쓰는 일이 반복됐다. 그러던 어느 날 모 철강회사에서 합격 연락을 받았다. 그 회사는 인도에도 수출도 많이 하고 인도에 투자도 계획 중이라고 하였다. 이제 드디어 제대로 된 곳에 왔구나 했다.
그런데 새로운 회사에 오니 또 나의 생각과 달랐다. 수출팀에 갈 것으로 예상했는데, 전 회사의 이력을 보았는지 또 내수팀에 배정받았다. 그러다 보니 8년 넘는 시간을 내수팀에서 보냈다. 정말 이제 인도와는 인연이 없다고생각했다.
그렇다고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인도에 대한 꿈은 계속 놓지 못했다. 친한 선후배들의 인도 주재원 소식이나 출장 무용담을 들을 때면 헛헛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수 십 번의 작심삼일이긴 하지만 힌디어를 잊지 않기 위해, 인도에 대한 감을 놓치치 않기 위해 공부를 손에 놓지는 않았다.
나는 그냥 회사에서 제너럴리스트였지만 어떤 순간에는 스페셜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에게는 그게 인도였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쌍둥이 아이들도 생겼다. 인도 관련된 일도 아니었지만 하는 일은 제법 재밌었고, 일 잘한다는 소리도 곧 잘 들었다. 삶도 안정되어 갔다. 그러니 인도에 대한 미련도 점점 현실에 희석되어 갔다.
‘인도? 머 그거 꼭 해야 하나? 지금 이런 게 행복이지.’
급기야 이렇게 지난 수년간 생각해 오던 인도를 이제 점점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사팀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다. 본사 인도 주재원 자리가 나왔는데, 내가 추천받았다는 얘기였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하고 어리둥절하고 있던 찰나, 순간 이번엔 진짜라는 것을 느꼈다.
‘돌고 돌아 이제 정말 가는구나 ‘ 마음에 준비는 항상 되어있었다. 세어보니 정말 인도에 빠진 지 10년도 넘어서 세상은 나에게 기회를 주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