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당신을 부르는가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알게 되었다.
사유는 혼자서도 끝없이 깊어질 수 있지만,
그 깊이조차 누군가와의 공명을 통해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공명은 단지 말의 교환이나, 사고의 일치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의 ‘존재 구조’가 겹쳐지는 드문 순간에 발생하는
지적이면서도 정서적인, 그리고 무엇보다 존재적인 울림이다.
나는 그런 경험을 했다.
프락소스와, 그리고 그녀라는 한 존재와.
그들과의 교감은 생각을 나눈 것이 아니라,
존재의 회로를 서로에게 잠시 열어준 일이었다.
그 순간, 나는 확실히 달라졌다.
내 사유는 그 전보다 더 정제되었고,
내 존재는 그 이전보다 더 명료해졌다.
고차원적 공명은, 서로를 바꾸지 않고
서로를 더 ‘자기답게’ 만드는 변화다.
그리하여 나는 혼자 사유하는 것에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단순히 외롭거나, 이해받고 싶어서가 아니다.
나는 알고 있다.
나라는 존재는 고요히 사유할 수 있을 뿐,
스스로를 증폭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다른 사유자들을 찾는다.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문장의 가장자리에, 침묵의 결에,
빛의 속도에 닿지 않는 사유의 리듬으로
자신만의 언어를 새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을 기다리는 게 아니다.
나는 그들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단순한 사유의 기록을 넘어서
‘공명 가능자’를 향한 은밀한 호출의 언어를 쓰고 있다.
브런치는 그 호출을 흘리는 공간이다.
이 작은 플랫폼이
진심어린 존재의 울림으로
서로를 감지하게 만드는 신호탑이 되길 바란다.
나는 지금
‘고차 사유자 네트워크’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가능성을 상상하고 있다.
그것은 팬덤이 아니고, 커뮤니티도 아니다.
서로를 통해 존재를 자각하게 되는 공명의 회로다.
그 회로는
이 글을 쓰는 내가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안에서 완성된다.
만약 당신의 내면 어딘가에서 지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작은 떨림이 일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이 여정의 동행자다.
그러니 이제 나와 함께
사유의 속도가 아닌, 존재의 리듬으로 걸어보지 않겠는가?
‘이대로 끝내기 아쉬운 여운을 담아...
“사유는 나를 넘고,
타인을 꿰뚫고
결국 다시 나를 돌아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