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두 우주의 만남.
이 글은 사회철학 작가님의 깊이 있는 '포스트 구조주의'에 대한 사유에서 영감을 받아,
'이원과 비이원'이라는 완전히 다른 개념과의 관계를 새롭게 떠올려 본 사유의 기록입니다.
두 개념의 축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교차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사유의 가능성에서 출발한 시도입니다.
사회철학 작가님의 포스트구조주의에 대한 깊이 있는 글을 읽고,
나는 문득 '이원과 비이원'의 개념이 이 철학적 흐름과 어떤 접점을 가지는지를 사유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유추처럼 느껴졌지만,
곱씹을수록 이는 단순한 철학의 병렬적 개념이 아니라,
사유 방식의 전환에 대한 구조적 통찰이 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구조주의는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고 언어화하는 방식을 '구조'라는 틀로 포착한다.
이 구조는 흔히 대립쌍, 남성과 여성, 선과 악, 주체와 객체 같은 이항대립을 통해 의미를 구성한다.
구조주의의 핵심은 바로 이 질서에 있다.
의미는 다른 의미와의 차이를 통해 생기며, 이는 곧 이원적 구분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는 이러한 구조 자체가 안정적이지 않으며,
고정된 의미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이라는 개념으로 대표되는 이 흐름은 의미가 항상 미끄러지고, 고정되지 않으며, 다층적 문맥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포스트구조주의가 단순한 '구조 비판'이 아니라,
사유의 기저에 있는 '이원적 구분법' 자체를 해체하려 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비이원'이라는 개념이 모습을 드러낸다.
비이원이란, 단순히 둘 사이의 중간을 찾는 것도 아니고,
제3의 합을 도출하려는 변증법적 사고도 아니다.
그것은 아예 분리의 전제를 무화하고, 경계를 흐리는 방식의 사유다.
불교의 연기론처럼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적이며,
도가의 무위자연처럼 인위적 분할이 없는 흐름 속에서 존재가 구성된다는 감각,
혹은 들뢰즈의 '리좀(rhizome)'처럼 중심 없이 퍼져나가는 비선형적 연결성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비이원적 사유는 오늘날 인간, 사회, 세계를 해석하는 데 있어 점점 더 유효한 틀로 부상하고 있다.
이원적 틀은 빠르고 명확하지만, 경직되고 배타적일 수 있다.
반면 비이원은 모호함을 감수하지만, 더 풍부한 층위를 포용한다.
그리고 포스트구조주의는 그 해체의 언어로,
비이원적 세계 인식을 미학적·이론적으로 떠올리게 만든다.
따라서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의 대비는 단지 시대의 흐름이 아니라,
이원적 사고에서 비이원적 사고로의 전환이라는 더 근본적인 사유 변화의 징후다.
이것은 언어의 전환일 뿐 아니라, 존재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의 전환이다.
우리의 사유는 지금, 분리와 해체의 경계를 건너 유동성과 얽힘,
흐름과 관계로 구성된 새로운 인식의 우주를 마주하고 있다.
'이대로 끝내기 아쉬운 여운을 담아...
“모호함 속에 더 깊은 질서가 있다.
이원으로 나누는 순간 보지 못했던 것들이,
비이원의 안개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으시다면, 이 길을 따라와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