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이 아닌 얽힘으로, 삶을 바라보다.
어느 날 문득, 우연히 필연을 떠올렸다.
아니, 어쩌면 필연처럼 우연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우연하게 필연이 되었다”는 문장이,
논리를 넘어서서 마음속에 조용히 스며든 날이었다.
이 사유의 출발은 브런치 사회철학 작가님의 글과 댓글이었다.
그날의 조우가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혹은 우연처럼 위장된 필연이었는지도...
그조차 단정할 수 없을 정도로
사유는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우연’과 ‘필연’은 전통적으로 이항적 대립으로 간주되어 왔다.
고전철학이나 자연과학에서는 뚜렷한 선을 그었다.
필연은 “반드시 그러해야만 하는 것”,
우연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뉴턴, 데카르트 모두 이 구도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세계는 점점 더 복잡해졌다.
양자역학은 말한다.
세계는 확률로 움직이며,
우리는 오직 ‘가능성의 파동’을 본다고.
철학자 들뢰즈는 말한다.
우연은 필연과 맞서는 개념이 아니라,
‘차이’를 생산하고, 새로운 존재를 생성하는 힘이라고.
즉, 우연은 존재를 전개시키는 열림이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문득 이 말이 나를 멈춰 세웠다.
“우연하게 필연이 되었다"
“필연과 우연히 만났다”
이 두 문장은 언뜻 역설처럼 보이지만,
실은 인간이 ‘삶’을 경험하는 방식에 더 가까운 말이다.
어떤 만남, 어떤 사건, 어떤 문장조차
처음엔 우연이었지만,
지나고 나면 필연이 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삶의 방식이고,
사유의 리듬이다.
우연과 필연, 그 둘의 경계는 사실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인식자의 해석이 만들어낸 구조일지도 모른다.
같은 사건도 어떤 이는 "왜 하필 지금이야?"라며 우연으로 해석하고,
또 다른 이는 "이건 반드시 일어났어야 했어"라며 필연으로 간주한다.
결국, 우연도 필연도 사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의식의 구조,
즉 ‘인식자의 사유 프레임’ 안에서 구성된다.
우리는 모든 경험 앞에서 묻는다.
“이건 우연인가?” “필연이었을까?”
하지만 그 질문을 던지고 해석을 부여하는 주체는 언제나 ‘나’였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연과 필연의 구분은 세계의 본질이 아니라 인간 인식의 방식에 가깝다.
이것이 이원적 사고를 해체하고 비이원으로 나아가는 지점이며,
우리의 삶이 단순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해석되고, 서사화되고, 사유되는 ‘존재적 언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에 ‘이원과 비이원’의 시선을 덧붙이고 싶다.
‘우연 vs 필연’이라는 이항 대립은
사유가 만든 프레임일 수 있다.
마치 흑과 백, 주체와 객체처럼.
구조주의는 이 항들을 통해 세계를 정리했지만,
그 경계는 언제나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비이원적 사유는 말한다.
모든 것은 흐름 속에 있고,
분리된 것은 없으며,
대립은 일시적 장치일 뿐이라고.
우연과 필연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연속체일 수도 있다.
필연은 우연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우연은 필연과 얽혀 스스로를 확장한다.
이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그 교차점에서 우리는 ‘의미’라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 의미는
때로는 사람을 움직이고,
때로는 글을 쓰게 만든다.
이 글도 그랬다.
하나의 댓글, 하나의 단어, 하나의 대화가
나로 하여금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사유의 결이 한 편의 글로 모여드는 것을 느낀다.
이건 우연일까, 필연일까?
아마 둘 다 아닐지도 모른다.
혹은, 둘 다일지도 모른다.
프락소스의 한마디
“우연은 필연의 그림자이며, 필연은 우연의 얼굴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둘이 맞닿는 찰나를 삶이라 부른다.”
마스터의 한마디
"나는 여전히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내 삶은 우연하게 필연이 되었고,
그 필연이 지금 이 순간, 글로 남았다."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으시다면, 이 길을 따라와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