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국수
시간이 많아졌다. 뭐라도 해 먹어 볼까 하는 마음이 다시 들 정도로. 약 한 달 전 업무 관계로 받은 생면 제품들이 있었다. 어제는 메밀생면으로 들기름 막국수를 해 먹었는데, 뒷정리를 하면서 냉장고를 다시 보니 소면도 있었다.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아, 빨리 뭐라도 해 먹어야 했다. 뜨겁게 먹기는 덥고, 차가운 육수는 만들기 어렵고. 근데 매운 건 먹고 싶고. 그렇게 냉장고에서 '보물'이 되기 전에 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주말의 점심 메뉴. 비빔국수였다.
김치를 가위로 잘게 썬 다음 진간장, 참기름, 고춧가루, 설탕, 고추장을 넣고 섞어서 양념장을 만들었다. 처음 간을 보니 살짝 달달한 느낌. 레시피를 다시 보니 식초를 조금 넣어도 좋다기에 추가했다. 그런데 너무 많이 넣었나? 신 맛이 좀 강해진 것 같아서 당황. 그래서 설탕을 조금 더 넣어 간을 다시 맞췄다.
그동안 고명으로 쓸 삶은 달걀도 만들었다. 원래는 양념장을 만들고, 그다음 달걀을 삶고, 그다음 면을 삶아야지. 그렇게 앞의 한 과정을 끝내고 차례대로 해야지 생각했는데. 그러다 보면 또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그 사이 시간을 못 기다릴 것 같기도 했고. 그래서 양념장을 위한 김치를 썰어둔 다음, 냅다 냄비부터 세팅해 물을 올렸다. 달걀을 삶기 위한 작은 냄비, 면을 삶기 위한 큰 냄비까지 총 두 개. 냄비만 세팅했을 뿐인데 왠지 전문가가 된 듯한 느낌에 혼자 으쓱했다. 완벽한 방법이란 없다. 최선을 다하는 것뿐. 그냥 해보는 거지 뭐.
이전에 부활절 선물을 위해 달걀을 삶으면서 나름 배운 게 있다. 냉장고에 있던 찬 달걀을 바로 삶기 시작하면 깨질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일단 냄비에 물을 받아 잠시 달걀을 담가둔 다음 불을 올렸다. 역시, 뭐라도 경험해 두면 나중에 쓰일 수 있구나. 그때는 30개 넘는 달걀이었고 지금은 단 2개. 그만한 경험이 있으니 이번에는 뚝딱 해낼 수 있었다.
양념장을 다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묽었다. 면을 다 비빌 수 있을까 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딱 적당했다. 역시, 끝까지 안 해보면 모르는구나.
면을 삶고 나서 찬 물에 식히는 순간을 은근 기대한다. 손끝에 닿는 면의 보들보들한 촉감이 참 좋다. 조금씩 차가워지는 면의 온도를 느끼면서, 쫄깃해질 식감을 생각하니 더 두근거리기도 하고.
큰 보울에 만들어둔 자작한 양념장에, 차갑게 헹궈낸 면을 넣고 슥슥 비벼줬다. 빨갛게 물들어가는 소면을 보면서 얼른 먹고 싶은 맘이 들었다. 그렇게 골고루 잘 비벼둔 후, 삶은 달걀도 껍질을 벗겨 반으로 잘라줬다. 칼로 거칠게 잘린 삶은 달걀의 단면이 은근 신경 쓰이지만. 그 자체로 투박한 멋이 있다. 그냥 비빔국수로만 먹을 수도 있는데, 색상도 그렇고 작은 사치를 포기할 수 없었다고 해야 하나. 달걀 삶는 것을 귀찮아하지 않은 나 스스로를 칭찬해 줬다.
완성된 비빔국수를 그릇에 담아서 가족들과 먹으려고 상을 차리는데, 누군가가 비주얼을 위해 깨도 뿌려보자고 한다. 먹기 시작하면 사라질 비주얼이지만, 그래도 그 순간을 포기할 수 없는 건 다들 비슷한 마음이구나. 내가 만든 비빔국수 사진을 찍기 위해, 예쁘게 담으려고 이리저리 유난을 떨던 내 모습을 응원해 주는 것 같아 든든하기도 했다.
요리를 하려면 귀찮기도 해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하면서는 나름 즐겁고 성취감도 있다. 시간과 의욕이 있다면 해볼 수 있는 게 요리, 아니 세상 모든 일들이 아닐까. 더운 날씨로 인해 몸과 마음의 컨디션이 더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을 지금. 머리 굴리기보다 일단 하기나 해 보기로. 갖고 있는 것들 슥슥 비벼 떡하니 만들 수 있었던 비빔국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