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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pe Aug 23. 2024

여름의 이파리, 겨울의 이파리

아직 햇살이 뜨겁지만, 아침저녁에는 날씨가 조금씩 선선해졌다. 요즘 아침에 일어나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다음, 간단한 산책을 위해 집을 나선다. 최대한 더위를 피하는 선에서, 코에 바람을 넣을 수 있는 활동이랄까.


하루는 집에 있어야지 하면서도, 결국에 나오게 되는 이유는 날씨의 영향이 크다. 특히 맑은 날씨가 되면 집에만 있기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푸른 하늘만 보면 못 참는 병이 있다. 그리고 요즘 같은 여름철에는 푸른 이파리를 보면 못 참는 증상으로 합병증까지 생겼다. (찌르듯 울리는 매미나 벌레 소리는 여전히 무섭고, 내가 가까이 갈 때마다 소리가 멈추면 소름까지 돋지만.) 그래도 맑은 날씨에 보이는 초록 나무와 이파리들은 참 예쁘다.



그렇게 머리 위 가로수의 나뭇잎만 보던 나는, 문득 눈높이 아래에 있는 화단의 나무들을 보게 됐다. 그리고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파리들을 봤다. 어디서 봤더라...


'맞아, 그 이파리들이구나.'


겨울에 눈이 내리면 나는 '환자'답게 또 바깥으로 나선다. 그리고 그 눈이 쌓일 정도가 되면 꼭 눈사람을 만든다. 손바닥만 한 작은 눈사람이다. 두 덩이의 눈뭉치로 기본 형태를 만든 다음, 그다음 작업을 위해 아파트 화단을 두리번거리곤 했다. 눈사람의 눈과 입, 그리고 팔을 만들기 위해서다. 색이 바랜 이파리와 가지들을 떼어다가 눈사람을 꾸며주곤 했다.


작년 겨울에 만들었던 눈사람. 눈과 입, 팔의 재료가 그 이파리다

그렇게 겨울철에만 보던 눈사람의 재료들을, 화창한 여름날 다시 보게 된 것이다. 푸른색을 간직한 모습을. 푸른 나무의 일부로 여전히 있던 것을, 겨울이 되어서야 눈여겨봤다니. 누가 뭐라고 한 적도 없지만 혼자 묘하게 찔렸다.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지금 내 곁에, 내 주위에 있는 것들. 내가 가진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 이파리처럼, 지금은 몰랐다가 나중에야 그 가치를 알게 되는 것들이 또 있을지도 몰랐다. 달리 표현하자면, 나의 현재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들 말이다.


무언가를 인정하기 위한 기준이 높지 않지만, 그에 닿기까지 시간이 참 오래 걸린다. 그리고 그런 기준들이 또 여러 가지다. 한 마디로 완벽주의.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이 '기준'이란 것이 거의 없으며, 가짓수도 적은 상태를 '순수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순수한 마음으로, 내가 원한 모양이 아니더라도, 당장 이뤄지지 않더라도. 아주 작더라도 내가 느낄 행복을 발견하면 참 좋겠다. 그러려면 일단 뭐라도 해봐야겠지. 이만큼 해야 만족할 수 있겠다는, 나를 괴롭히는 점수표부터 만들지 말고.


다시 이파리 이야기로 돌아가서. 여름의 이파리와 겨울의 이파리까지 즐기고 있으니, 그때마다 현재를 즐기며 살고 있는 것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이런 작은 발견이 참 즐겁고 소중하다. 또 이렇게 글로 남길 수 있어 감사하다. 표현할 단어를 고르며 매만지는 이 과정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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