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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만들고 비워내야지

마제소바

by grape

점심 약속이 있어 외출을 한 사이, 엄마의 문자가 왔다. 저녁에 순두부찌개를 끓이려고 하니 다진 돼지고기를 사 오라는 심부름이었다. 장보기에 빠진 품목들은 이렇게 나의 심부름거리가 되곤 한다.


집에 가면서 마트에 들렀다. 다진 돼지고기는 800g 단위로만 있었다. 이전에는 300g 단위로도 팔았었는데. 양이 좀 많았지만 이것밖에 없으니 일단 사가기로 했다.


역시나 순두부찌개를 끓이고 나서도 재료가 남았다. 남은 고기를 어떻게 쓸 수 있을까. 그러던 중 동생이 만들어줬던 마제소바가 떠올랐다. 그래, 내일 점심은 마제소바다.


먼저 다진 돼지고기에 양념을 해서 볶아야 한다. 고추기름이 필요했는데, 없으니 직접 만들기로. 식용유를 약불에 데우다가 고춧가루를 넣고, 타지 않도록 천천히 볶아준다. 나중에는 다진 마늘도 넣어 향을 낸다. 여기에 다진 돼지고기를 넣고 볶아준다.


그런데 마음이 급한 나머지, 해동이 덜된 다진 돼지고기를 넣어 버렸다. 결국 고기만 따로 빼내 전자레인지로 살짝 해동 시도. 그동안 다른 재료들을 손질하기로 했다. 대파 흰 부분, 부추를 잘게 쫑쫑 썰어준다. 대파는 흰 부분 위주로 해야 고기와 양념의 느끼한 맛을 잡아준단다.


해동이 끝난 고기는 다시 프라이팬으로. 볶은 고기가 어느 정도 익으면 진간장, 맛술, 굴소스를 넣어 마저 볶아준다. 고기가 뭉치지 않도록 부드럽게 으깨(?) 가면서. 그렇게 볶은 고기는 잠시 식혀둔다. 그다음 진간장, 설탕, 식초, 깨를 넣어 다른 소스를 만들어 둔다. 보통 마제소바는 자작한 고기 양념에 면을 비벼 먹곤 하는데, 내가 참고한 레시피는 양념의 양이 모자랄 수 있으니 예비 소스를 만들어 두는 것.


이제 면을 삶아줄 차례. 원래는 우동면으로 하고 싶었으나 유통기한 계산 미스로... 중면을 사용하기로 했다. 면을 삶아 미지근한 온도가 남을 정도로 찬물에 헹궈준 다음 그릇에 담는다. 그리고 이제 고명들을 차례로 얹어 준다. 묘하게 긴장감이 생기는 순간. 서로 섞이지 않게 구역을 나눠서 천천히 담는다. 빨간색 양념고기, 흰색 대파, 초록색 부추, 검은색 김가루, 노란색 다진 마늘. 그리고 깨와 달걀노른자로 화룡점정.


이때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다. 그릇에 면과 고명들을 담을 때 어느 정도 공간을 남겨둬야 했다는 것. 그래야 푸짐한 고명들과 면을 여유롭게 비빌 수 있었다. 그것도 모른 채 그릇에 거의 꽉 차게 담으니, 비빌 때 재료들이 서로 잘 섞이지 않거나 넘치곤 했다. 욕심이 과했다. 예비 소스를 살살 부어가며 비벼줬다.


조심스레 식사는 마쳤지만, 이 과정에서 얻은 또 하나의 교훈. 완벽하게 준비했어도, 그 일이 굴러갈 공간을 남겨두지 않는다면 이후의 과정도 쉽지 않다는 것. 그래서 여유란 것이 중요한가 보다.


여유. 공간. 남기는 것. 비우는 것. 나의 로망이지만 그것을 실현할 방법과 기준은 아직도 찾지 못한 채 혼란스러운 상태다.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쉬는 것도 중요한데. 잘 쉬는 나만의 방법을 아는 사람이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채우지 못해 불안하고 조급함으로 보내곤 하는데. 오히려 공간을 만들고 비워내야 하는 시기인 걸까. 여전히 혼란스럽다. 그래도 이때 꼭 발견하고 싶은 건, 공간과 여유를 만들어내는 나만의 방법을 찾는 것. 물론 다른 이들의 방법이나 조언을 참고하며 시행착오를 겪기도 해야겠지만. 나만의 방법을 찾는, 외롭고도 의미 있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몽땅 비벼 섞고, 꽉 채워버리겠다는 각오를 담고자 만들어본 마제소바였는데, 오히려 공간과 비움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역시 내 계획대로 되는 건 없네. 하지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득하구나 아주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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