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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그의 이름을 알게 만든 것

슈타이들 북 컬쳐 : 매직 온 페이퍼

by grape

지난날 출판 에이전시에서 일했을 때 체감한 게 있다. 책 또한 결국 상품이라는 것. 수익 구조에 반드시 필요하며, 독자들이 읽을 만한 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냉정한 현실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인식 가운데 슈타이들의 행보는 눈에 띄었다. 책에 대해 "무한히 생산할 수 있는 민주적인 미술작품"이라고 말한 것이다.



종이책 출판 과정을 그야말로 예술로 승화시킨 게르하르트 슈타이들(Steidl). 출판사 대표이자 아티스트다. 그야말로 그는 책을 작품으로 여기며 만들고 있다. 원고는 작가가 집필하지만, 슈타이들은 그 원고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데 온 정성을 다한다. 기획, 편집, 인쇄, 제본의 과정 하나하나 세심하다. 슈타이들 출판사 건물에는 그에게 책 출판을 의뢰하는 작가들의 대기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란다. 그 대기실 또한 다양한 이력을 지닌 작가들의 교류 공간으로 발전했다.


책은 '기록'의 결과라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다.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디지털의 가속화가 일어나도, 종이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슈타이들 또한 나와 뜻이 같다니, 든든하고도 뿌듯했다.



서체와 그 배열, 종이의 재질과 규격, 인쇄 방식과 제본까지. 슈타이들이 만든 책들은 단순히 인쇄물이 아니라, 작품으로써 온몸으로 작가의 메시지를 전한다. 유명 작가들과의 콜라보 한정판인 '멀티플', 브랜드의 의뢰로 제작한 '팩토리 북'이 대표적이다. 과장을 좀 더 보태어, 이 책들의 공통점이라고는 사각형이라는 것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책장에 쓰인 영어를 잘 모르니(?) 오히려 디자인에 눈이 갔고, 그래서 슈타이들만의 특징이 더 돋보인듯하다.



전시관인 '그라운드시소 서촌' 건물 또한 남달랐다. 벽에 게시한 것은 물론 종이에 인쇄해 걸어놓기도 하고, 심지어 몇 권의 책들은 통로 바닥에 놓기도 했다. 틀을 벗어난 것 투성이었다. 마치 전시 제목처럼 '매직(Magic)'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슈타이들의 클라이언트들은 또 얼마나 유난스러웠을까. 그와 작업한 대표 아티스트들의 특징만 보더라도 짐작이 간다. 그러나 슈타이들은 새로운 도전들에 오히려 흥미로워하며 즐거워했을 것이다. 그 열정이 부럽다.


전시가 열린다는 소식은 일찌감치 알았다가 어느새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굿바이 티켓 할인'이라는 광고를 보고 정신이 번쩍 났다. 선뜻 나서지 못했지만, 역대 최대 전시인 데다 곧 마지막이라는 것. 그리고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 맘에 티켓을 구매했다. 결론은, 보기 잘했다. 단순히 눈으로만 보는 전시가 아니었다. 직접 그 책들을 보고, 만지고, 듣고, 맡고, 느낄 수 있었다. 이런 호사가 또 어딨을까.



인쇄 작업도 단순한 노동이라고 생각했는데 큰 착각이었다. 이것 또한 '표현 수단'이었다. 전시 막바지, 벽에 쓰여 있던 '오프셋(Offset : 인쇄 기법의 일종)이여, 영원하라'라고 했던 슈타이들의 말이 갑자기 떠오른다. 당시에는 별로 와닿지 않은 글이었는데. 지금 다시 곱씹어보게 된다.


"나는 책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게 내가 출판 시장에서 살아남고, 성공한 비결이었다."


성공하기 위해서 움직인 게 아니라, 내가 믿은 것에 확신을 갖고 움직였다. 이것이 슈타이들 본인이 즐겁게 일하고, 또 세상이 그의 이름을 알게 된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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