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rape Dec 13. 2022

넉넉해지고 싶어

월남쌈

"좀 깨끗한 음식을 먹어야겠어!"


어느 날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던 와중 동생이 말했다. 12월 연말, 약속들이 많아지는 시기. 그만큼 외식은 물론 자극적인 음식들을 많이 먹게 되니 나온 말이었다. 남일 같지 않았다.


그다음 날, 나는 웬만하면 하지 않을 말을 내뱉고 만다.


"오늘 저녁은 내가 월남쌈 준비할게!"


월남쌈은 특히 재료 준비에 손이 많이 가서, '다음에는 하지 말아야지'하는 메뉴 상위권에 속한다. 하지만 가장 최근 만들어 먹은 이후 시간이 꽤 지나서 그새 까먹었나 보다. 그리고 또, 나도 뭔가 몰두할 게 필요했나 보다. 씻고, 썰고, 굽고 하면서 뭔가 잡생각들을 없애고 싶었다.


같은 음식이라도 가정마다 레시피가 다르기 마련. 월남쌈은 특히 더 그럴 것 같다. 이번 우리집 월남쌈 재료 라인업에는 맛살, 당근, 파프리카, 깻잎, 무순, 양파, 쌈무가 올라갔다. 먼저 양파를 채 썬 다음 찬물에 담가 놓아 매운맛을 빼준다. 예전에 담가놓는 시간이 부족해 매운맛이 남았던 기억이 있어서, 제일 먼저 양파를 손질했다.


그다음은 당근 채썰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딱딱한 재료를 먼저 손질하기로 했다. 그다음 노란 파프리카 채썰기. 그리고 깻잎은 돌돌 말아 채 썬 다음 손으로 풀어주기. 맛살은 길게 잘라주고, 무순도 씻어주었다. 이어서 큰 접시에 각 재료들을 둥글게 담았다. 색깔에 맞추어 가지런히 놓이는 재료들을 보니 뿌듯했다.


여기에 나 스스로 감탄한 아이디어 하나 더. 원래 재료는 파인애플이었는데 생각보다 비쌌다. 그래서 집에 있던 사과를 쓰기로 했다. 사과를 껍질째 채 썰어 올려보니 색깔부터 어울렸다. 직접 싸서 먹어보니 맛도 파인애플 못지않았다. 이렇게 응용해보는 것이 요리의 빠질 수 없는 재미인가 보다.   


야채, 채소 재료들의 손질과 플레이팅이 끝나고 나면 접시의 가운데 공간이 남게 된다. 여기에는 단백질, 지방질(?) 재료가 올라가야 한다. 나는 닭가슴살, 새우, 대패삼겹살로 정했다. 여기서 새우는 칵테일새우가 아닌,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작은 새우. 그마저도 따뜻한 물에 데치고 나니 크기가 더 귀여워졌다. 닭가슴살은 전자레인지로 데운 다음 손으로 찢어준다. 대패삼겹살은 소금 간을 하며 구워준 다음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새우와 닭가슴살을 접시의 빈 공간에 담고, 대패삼겹살은 아쉽지만(?) 다른 새 그릇에 담았다.


알록달록.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했던 월남쌈 재료들

이즈음 되니 재료 손질로 인한 노곤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배도 더 고파졌다. 서둘러야 했다. 전기포트에 물을 데운 다음, 넓은 보울에 따라서 찬물과 섞어준다. 그리고 라이스페이퍼와 소스를 세팅하면 끝! 앞서 채 썰다가 남은 사과는 다시 잘라 각 앞접시에 장식해주었다.


월남쌈은 특히, 재료 손질하고 만드는 시간에 비해 먹는 시간은 더더욱 짧게 느껴진다. 하지만 원하는 만큼 풍성한 재료로 건강하게 먹을 수 있어 만족스러운 저녁이었다.


다만, 양을 가늠하지 못해 손질하고도 남은 재료가 있었다. 바로 파프리카와 양파. 올리기 전에는 이 정도면 되겠지 했는데, 막상 플레이팅을 하면서 보니 올라가는 양이 많지 않아서 당황했다. 하지만 파프리카는 샐러드처럼 반찬 같이, 채 썬 양파 또한 다른 요리 재료에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괜히 '요리 큰손'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순간 철없고도 설레는 바람이 생겼다. 이렇게 남아도 좋으니, 누군가를 위해 넉넉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먼저 넉넉히 채워지고, 그것을 흘려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왕 먹을 거면 제대로 먹어야지. 넉넉하게!


매거진의 이전글 일단 냉장고를 열어보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