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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pe Jan 23. 2023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

<작별인사> 김영하

작년 12월의 어느 날 아침, 교보문고에서 서비스 문자를 받았다. 포인트가 곧 소멸되니 31일이 되기 전에 모두 사용하라는 알림이었다. 그냥 보내기 아까운 금액이었기에, 나는 당장 저장해 둔 리스트를 뒤져보았다. 에세이, 인문 등 다양한 분야 사이 한 책이 눈에 띄었다. 바로 김영하 작가의 장편소설 <작별인사>. 한 해의 끝을 앞둔 이 시점에 '작별인사'라니. 왠지 모를 끌림에 포인트를 사용하여 책을 주문해 버렸다.


상황과 기분에 따라 보이는 책이 달라지는 것은 무척 당연한 일이다. 이 책을 리스트에 저장했을 당시의 나의 상태는 어땠을까. 일단 김영하 작가의 인지도와 영향력이 한몫했을 것이다. 또한 아무 생각이 없어지도록, 누군가가 꾸며놓은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마냥 읽을 수 있는 소설을 담아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웬걸. 막상 책을 펼쳐보니 복잡한 명제들 투성이었다. 인공지능, 휴머노이드, 인간 대 기계의 구도부터 생명, 존재, 의미... 꽤나 묵직한 단어와 이야기가 나열되어 있었다. 무언가 배신당한 기분이었지만, 내가 이 책을 골랐으니. 심지어 빌리거나 중고책도 아니고 신간을 샀으니. 묵묵히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김영하 작가가 펼쳐놓은 상상력에 사로잡혔다. 아니, 인공지능의 이야기인 만큼 모든 게 상상의 산물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거의 사실에 가까운, 앞으로 올 미래의 이야기일 수 있다. 그 모든 결과를 이렇게 압축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는 것도 참 놀라웠다.



주인공 철이는 놀랍도록 인간의 거의 모든 것을 닮은 휴머노이드이다. 작가는 이런 철이를 통해 인간의 오랜 고민과 숙제를 객관적으로 제시한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 의미'.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이끈다. 민이, 선이, 달마, 최 박사 등의 다른 인물들 또한, 인공지능과 생명을 바라보는 저마다의 시선을 대변하는 듯하다.  


나의 의식이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나는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 즐기던 것들에 흥미를 잃어갔다.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것들은 모두 필멸하는 인간들을 위한 송가였다. 생의 유한성이라는 배음이 깔려 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 없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이야기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주는 놀라운 장치로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상상 속에서 살아보게 해주었다. 그러니 필멸하지 않을 나로서는 점점 흥미가 떨어졌던 것이다.
_'마지막 인간' 276쪽


어느 방송에서 보았는데(내 기억에는 이 이야기도 김영하 작가가 패널로 나와서 했던 것 같은데, 헷갈린다), 인간과 동물의 큰 차이점은 바로 '이야기'라고 했다. 이야기를 만들고, 또 그것을 찾으며 즐기는 것. 이 주장이 소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누군가에게 꽃을 선물하는 것 또한 '가장 아름다운 지금', '현재'를 바라보게 해주는 것이라고 들었다. 어쩌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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