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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pe Feb 14. 2023

잠시 멈추고 오롯이

서울 송파구 '뷰클런즈'

어릴 적 친구의 청첩장 모임이 잡혔다. 석촌역에서 평일 저녁 8시. 거리도 제법 있는 데다 시간도 늦은 저녁이었다. 불평이 생길 수밖에 없는 조건을 체념하며, 나는 전날밤부터 인스타그램에 저장해 뒀던 게시물 목록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송파구에 들러볼 만한 카페가 있으려나.


약 여섯 군데의 장소를 후보로 두었다. 그중 약속 장소와의 거리, 내부 공간 등을 고려해 최종적으로 정한 곳. 이 장소를 소개한 게시물 제목은 '서울에서 즐기는 세계 커피 명소'였다. 커피를 즐긴다니. 나에겐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지만 그래도 궁금한 곳이었다.


가는 방법을 찾아보니, 버스로 환승 없이 약 1시간 25분이면 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잠실 쪽까지 가는 버스는 평소답지 않게, 그날따라 내키지 않았다. 날씨도 흐렸다. 그래서 지하철을 타면서, 최근 빌려놓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약 40분 후, 석촌역을 나와 몇 차선의 자동차 도로를 오른쪽에 둔 채 대로변을 걸었다. 분명히 서울인데 더 혼잡한 곳에 온 느낌. 이 근처에 조용한 공간의 카페가 있을 거란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지도 어플을 봐가면서 길을 가는데, 카페 근처에 있어야 할 공원도 계속 보이지 않았다. '이 길이 맞는 건가?'



그런데 거짓말처럼, 골목길의 어느 한 코너를 돌아가니 작은 놀이터가 눈앞에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2층짜리 건물의 '뷰클런즈'가 자리하고 있었다. 카페 겸 책방인 뷰클런즈(bjorklunds)는 스웨덴의 커피와 그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스웨덴어 어원인 뷰클런즈는 '잠시 멈추고 오롯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영어로는 Pause.


1층은 카운터와 굿즈가 진열되어 있으며, 넓은 테이블과 벤치형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주제별로 큐레이션 하여 표지를 만든 책들, 문구 엽서들로 꾸며져 있었다. 덕분에 2층에 자리를 잡고 내려와 커피를 주문하기도 전에 그 전시에 먼저 푹 빠져버렸다. 나에게 하는 듯한 말들. 내가 누군가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 그 메시지들을 담은 문장들인 것만 같아 눈을 뗄 수 없었다.



스웨덴 드립커피, 따뜻한 디카페인 한 잔을 주문했다. 시간이 오후 4시를 지나고 있어 커피 말고 다른 음료를 주문할까 했으나, 왠지 이곳에서 스웨덴 커피가 마시지 않으면 아쉬울 것 같았다. 커피를 내리는 데는 10분 이상 시간이 걸리며, 책방을 겸한 공간인 만큼 대화나 통화를 할 때는 목소리를 낮춰달라는 직원 분의 당부를 받았다.


그리고 뷰클런즈의 공간을 만들 때 영감을 얻었다는 문장들이 적힌, 카드들이 담긴 상자에 대해서도 안내를 받았다. 상자에서 한 장씩 카드를 뽑아보라는 것이었다. 마치 포춘쿠키처럼. 내 카드에는 글쓰기에 대한 문장이 나왔는데, 반가우면서도 그 문장의 출처가 <싯다르타>라는 것에 살짝 놀라기도 했다.



2층 공간 또한 정적이며 다양한 콘셉트로 꾸며놓았다.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공간들을 구경하느라 커피가 나오는 것이 오래 걸린다는 사실도 느끼지 못했다. 쿠키 같은 디저트류도 함께 주문할까 고민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음료만 마시길 잘했다. 나중에 저녁도 먹어야 하고, 무엇보다 너무 배부른 채로 내내 있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커피와 함께 책을 읽으면서 약 세 시간 정도를 보냈다. 책을 읽을 만한 자리를 미리 봐둔 곳이 있었는데, 내가 갔을 때 그 자리는 이미 꽉 차 있었다. 벤치형이 아닌, 의자와 테이블이 함께 있어 노트북이나 글쓰기에 적합했던 공간. 하지만 이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시간을 보냈던 벤치형 자리가 딱이었다. 쿠션이 있어 딱딱하지 않았을뿐더러, 안쪽에 있어 집중하기도 좋았기 때문이다.


역시 핸드폰을 보지 않아야 한다. 이리저리 전시를 구경하며 다니다 보니 어느새 시간을 까먹게 되었다. 그래서 굳이 핸드폰을 보지 않았다. 핸드폰에 남긴 사진이나 글을 찾아야 할 때도, 시간 부분을 손으로 가리고 보았다. 예전에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일부러 시간을 보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 오지 않을 것 같던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마음에 그랬던 순간들.


책을 읽다가 잠시 집중이 흐려졌을 때, 마침 친한 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퇴근 시간대에 종종 통화를 나누는 언니다. 그 언니의 동네와 뷰클런즈의 거리도 멀지 않았다. 언니도 좋아할 것 같으니, 다음에 한번 와보라며 링크를 남겨 주었다.



어느새 창밖이 어두워졌다. 해가 점점 길어지며 일몰 시간도 조금씩 늦어지는 요즘이다. 그래서 대략 시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날 처음 읽기 시작한 책도 거의 반절 가까이 읽었다. 기한이 정해진 대출도서라는 점이 이렇게 책을 읽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는 생각에 혼자 웃음이 났다.


시간이 남아 책을 읽는다고 하지만, 역시 책을 읽기 위해 시간을 낸다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친구의 약속 덕분에 송파구의 매력적인 장소도 알고, 나름 책도 많이 읽을 수 있었으니 고맙게 여기기로 했다. 그래야 나의 하루도 더 즐겁게 기억할 수 있을 테니까.


"나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하는 와중. '잠시 멈추고 오롯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라는' 공간을 만났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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