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브라질리에 특별전_멈추어라, 순간이여!
작년 말, 친구가 다녀온 어느 전시의 후기를 보았다. 왠지 모르게 언젠가 꼭 보러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되었던 그 전시는 이후 약 3개월 동안 열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그 전시가 마지막주를 앞두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갔을까.
앙드레 브라질리에 특별전. 곧바로 티켓을 예매했다. 나는 전시를 보러 가면 작품은 물론 설명하는 텍스트까지 다 읽어본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이 전시는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하는 만큼 꽤 규모가 클 것이기에, 넉넉히 두 시간 정도를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전시는 사진 촬영이 허용된 작품이 한정적이었다. 나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의 관람 스타일을 존중하지만,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작품 앞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않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 전시회만의 제한 덕분에, 나도 사진 기록보다 작품에 더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주관적인 기준으로, 전시 작품은 크게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져 있었다. 음악과 서커스 등 영감을 준 것들. 해변과 바다, 숲의 자연과 말(馬)의 모습 등 치유의 순간들. 작가의 영원한 사랑이자 뮤즈인 그의 아내까지. 이 주제들은 다시 하나로 통하고 있었다. 바로 '행복'이었다.
평소 전시회에서 오디오 가이드를 잘 듣지 않는 편이다. 듣고 나면 그 설명대로만 작품을 보게 되는 게 신경 쓰인다고 할까. (물론 별도 비용이 드는 점도.) 그런데 전시장의 약 3/4 정도 둘러보았을 무렵, 멀리 입구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보니 내가 있던 전시장의 사람들도 부쩍 줄어있었다. 도슨트의 해설이 시작된 것이다.
예매를 위해 전시 정보를 찾을 때 본 적이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한 세 명의 도슨트 중 꽤 유명한 사람이 있다는 정보를.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막상 달라진 전시장 분위기를 마주하자 마음이 조금씩 바뀌었다. 입구 쪽으로 돌아가보니 마침 그 도슨트와 함께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잠시 고민했지만, '이때 아니면 또 언제 들어볼까'하는 생각에 나도 슬쩍 그 일행에 합류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시 기간 막바지에 듣는 도슨트의 해설은 매우 흥미로웠다. 작품에 대한 정보도 물론이지만, 이번 전시 기간을 거친 관람객들의 질문이나 만남들로 더 풍성해진 해설이었다. 작가가 작품을 그리며 담은 스토리, 그리고 그 작품을 보러 온 관람객들의 스토리까지. 한꺼번에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앙드레 브라질리에라는 화가를 알게 된 것도 정말 감사하다. 열한 살 때 겪은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 이후, 행복을 전하는 그림을 그리기로 다짐했다는 그. 이후 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초심을 지키고 있다. 그의 그림을 보고는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단다. 행복한 일만 겪은,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예술가라고 말이다. 하지만 도슨트는 이렇게 강조했다. '오히려 큰 슬픔을 겪은 사람이어서 이렇게 따뜻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라고.
역대 예술가들의 육체적,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때의 작품들이 제일 밝다고 한다. 앙드레 브라질리에도 마찬가지였다. 나아가 자신의 재능으로 행복을 전할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어 감사하다고 고백했단다.
지금까지 평생 사랑하고 있는 아내를 모델로 한 그림들과 설명도 기억에 남는다. 굳이 다른 기교를 넣지 않고 단순하게 그린 아내의 모습. 이미 그 자체로 아름답기에 표현을 더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가까운 일상의 순간들이 곧 행복이라는 메시지를 꾸준히 전해오고 있는 사람. 참 멋있었다.
생각지 못한 도슨트의 해설까지 듣고 나니 거의 세 시간이 지나있었다. 자신의 뜻, 그리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성실히 그려온 화가. 앙드레 브라질리에를 처음 알게 된 것만으로 이날 하루는 충분히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