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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상철 Apr 28. 2019

사람들은 왜 축구에 열광하나 [4]

물리력을 넘어서는 당파주의적 역동성

축구는 어느 정도까지는 물리적, 기술적 제한을 받지만 그 이상 넘어가면 정신적인 힘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 정신(영혼)적인 힘이란 선수의 정신력, 축구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집중, 재력, 응원, 열의 등 모든 것이다. 물리적 힘이란 수치로 계산해 낼 수 있는 부분이지만 그 한계를 넘으면 보이지 않는 힘에 부닥치게 된다. 이것이 정신(영혼)적인 부분이다. 사람들은 흔히 '신의 영역'이라 칭하기도 한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도 폭발적인 응원 결과로 정신적인 힘의 영역쯤 된다. 우연의 일치로 보긴 어렵다. 사람들은 이런 결과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정신적인 힘은 경로의 중간과정이 생략되고, 결과가 매우 더디게 나타난다. 심지어는 몇십 년, 몇 백 년 뒤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기간은 급속도로 짧아지고 있다. 과거에는 몇십, 몇 백 년에 걸쳐 더디게 나타났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빨리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축구 경기에는 사람들이 삶에서 추구하는 모든 영웅적 가치의 특권화 된 상징이 내재돼 있다. 이는 사회적 차원에서 관중의 시선을 통해 '우리'와 '적'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하게 되는 특징이 있다. 낭만적이고 무당파적인 방식으로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당파주의적 열정으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 '편들기' 방식의 당파주의적 열정은 관중의 정신에 저장되고 사회체계로 표출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축구 행위를 조직화하는 형식적 기초를 마련하게 된다.

우리에게 축구가 국가적 스포츠가 된 것은 2002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2002년 월드컵 주최와 사상 초유의 4강 진출이라는 놀라운 이변을 통해 축구는 바야흐로 국민 여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거리 응원과 한국 선수들의 호전 덕분에 축구의 사각지대에 머물던 여성마저도 축구 팬의 일원으로 흡수되었다. 이제 축구는 스포츠 혹은 관람의 대상이라기보다 축제의 장으로 확장된 것이다.

하지만 축구의 이미지가 상업적으로 남용되고 있다는 우려의 시각도 높다. 상업적 이미지가 축구를 노린다는 것은 그만큼 축구가 수많은 대중을 흡인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TV 버라이어티쇼, 광고, 영화, 출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에서 축구의 열기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축구와 축구 현상은 사회학적이며 정치적인 무의식에 육박하고 있다. 개봉 시기를 조율하고 있는 영화계에 월드컵이 악재로 받아들여지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상업적인 측면 중에서도 광고의 분야는 유별나다. 광고의 생명은 독창성이다. 독창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다른 광고와 차별화하기 위함이다. 차별화된 광고만이 소비자의 기억 속에 남기 때문이다. 모든 광고에서 월드컵을 말하는 것은, 그만큼 다른 광고와 차별화를 이루기 어려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국 축구는 개인보다 지나치게 내셔널리즘에 사로잡혀있는 측면이 크다. 월드컵 광고들에서 애국심과 민족적 자존심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동안 쌓였던 민족적 한풀이의 장이라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지구 상에서 축구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국가와 민족, 종교와 이념, 부국과 빈국, 인종과 언어를 막론하고 모든 인류를 동일한 규칙과 조건 아래 경쟁하도록 하는 시스템은 축구밖에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결과에 흔쾌히 승복한다. 지구를 지배하는 유일한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월드컵이 올림픽에 비해 더욱 열광적인 스포츠 축제가 된 것은 2개의 국가가 팀을 나눠 경합하는 축구의 특질 때문이라는 지적은 그래서다.

축구의 본질은 카타르시스에 있다. 갈등의 대리전쟁이기도 하다. 어쩌면 대리성의 원칙에 가장 충실한 나라가 우리나라일지도 모르겠다. 축구는 독특한 집단주의적 가치와 더불어 눈코 뜰 새 없이 몰아치는 격렬한 경쟁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갖고 있는 스포츠다. 이는 우리 사회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우리의 불행했던 근현대사가 유전자에 각인시킨 '자기 존재 증명' 욕구는 세계에서 으뜸일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프로 스포츠는 관람의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관람용 스포츠는 운동이기보단 연예의 일종이다. 사람들이 이에 열광하는 것은 놀이에 목마르기 때문이다. 일과 놀이의 리듬을 잃고 여가를 바로 누리지 못하는 현대인의 삶은 권태롭다. 관람용 운동경기는 대중오락과 함께 이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 열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순수한 놀이와 축제를 갈망하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다. 한편 그것의 폐해는 관중을 수동적인 오락적 관람에 길들여 놀이 자체를 잃게 만드는 데 있다.


사회 전체가 월드컵 열기에 함몰된 가장 큰 이유로 방송의 상업주의에 있다는 것도 이러한 판단이 주효하다. TV 방송들은 진작부터 독일 현지에 앵커들을 파견, 메인뉴스를 진행하는 등 월드컵 붐 조성에 나선다. 한철 광고장사를 하기 위해서다. 한 군데만 중계해도 되는 것을 TV 3사가 동시에 중계하는 이유다. 전파에다 외화 낭비다. 여기에 일반 기업들의 상업주의까지 가세하고 있다. 월드컵을 후원한다는 빌미로 자사 이미지 홍보에 여념이 없다. 월드컵의 인기에 편승하자는 발상이다.

월드컵에 함몰돼 모든 것을 잊고 살아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남기도 한다. 월드컵과는 관계없이 현실은 현실로 존재한다. 북핵 문제나 불황과 휘청거리는 경제, 미세먼지, 촛불 이후 지지부진한 개혁과 국정운영 등 사회적 현안은 현안대로 남아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개인 일상사의 문제가 월드컵에 이겼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축구가 사회를 지배하는 역동성에는 뭔가의 역사적 진화과정이 내재해 있다. 사람들은 이중적인 존재이다. 때로는 어지러운 삶을 싫어해 안정과 질서를 추구하면서도, 때로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삶의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쓴다. 그런 탓에 역사는 언제나 질서와 혼돈, 노동과 휴식, 창조와 파괴, 보수(안정)와 진보(개혁)로 점철된다. 그런데 축구장은 질서와 혼돈, 우연과 법칙을 가장 정교하게 배합할 뿐만 아니라 놀이와 시합, 스포츠와 상업, 선수와 청중을 가장 효과적으로 섞어놓는 절묘한 마당이 된다. 이 점이 사람들을 축구에 열광하게 만드는 것이다.
 
축구는 인간의 삶과 너무나 닮아 있다. 인생과 닮아 있기에 객관적인 전력이 약세인 팀이 강팀을 이길 수가 있다. 단 한 번의 기회, 단 한 골만으로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축구이고 인생이다. 축구는 현대인들에게 하나의 이념이자, 꿈의 구현이며,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는 일종의 전쟁이고 그 자체로 인생이기도 하다. 그래서 4년에 한 번 인류는 열병을 앓는다. 어쩌면 그 열병이 행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응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과거, 지금과 같은 거대한 스펙터클의 응원이 없었어도 정열적이면서 간절하게 선수들의 승리를 기원했다. 호프집과 다방에서 펄쩍펄쩍 뛰며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집에서 혼자 TV를 보면서도 우리는 함성을 질러댔고 그 함성소리로 온 동네가 하나가 되었다. 그때의 '응원 빨'이 지금의 그것보다 결코 부족함이 없음을 알고 있다.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응원하고 있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단지 잠깐 축구를 즐길 뿐만 아니라, 축구로부터 삶의 역동성을 터득할 필요도 있다. 인류의 역사 동안 인간은 손보다 발을 훨씬 더 오래 사용해 왔다. 발을 자주 사용하는 것은 몸과 정신 건강에 매우 유익하기도 하다. 정교한 손동작을 통한 문명의 발전도 필요하지만, 무심코 발을 내딛는 자연스러움도 필요하다. 전투적인 삶도 중요하지만, 자연의 섭리를 신뢰하는 삶도 중요하다. 축구야말로 조화와 공동체적 공존, 공영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인류의 유일무이한 역사적 제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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