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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상철 Apr 16. 2019

나는 아날로그가 좋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이분법 시대

요즘 세상에 ‘쿨한 사랑’과 ‘흔한 이별’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청순한 사랑과 순수한 연민 같은 것은 이제 영화에서나 볼 것 같다. 시대의 흐름은 물질의 욕망과 관계가 깊어간다. 그러면서 조화와 순수를 애타게 찾는 이중적인 경향을 점차 띠어간다. 세상은 경쟁과 성과 속에 보이지 않는 조화와 과정을 찾게 되는 것 같다. 끊임없이 디지털로 진화해 가면서 아날로그적 속성을 결코 놓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디지털은 데이터를 수치로 바꾸어 처리하거나 숫자로 나타내는 체계이다. 디지털의 디지트(digit)는 사람의 손가락이나 동물의 발가락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 즉 보이는 것이고, 계량 가능한 것이다. 반면 아날로그는 전압이나 전류처럼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물리량을 나타내는 체계이다. 사람의 목소리와 같이 연속적으로 변하는 신호 같은 것이다.


세상의 변화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변환 과정이다. 역사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전환 과정이다. 민주주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변증법적 관계이다. 아날로그는 협의적인 것이고, 디지털은 합의적인 형태를 띤다. 노동은 극히 아날로그적이며 자본은 디지털적이다. 사회의 양극화는 아날로그의 해체이자 디지털로의 유혹이다. 신자유주의란 아날로그에 대한 디지털의 해체 과정인 것이다.


신문명에 대한 집착은 디지털적이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는 아날로그적이다. 이렇듯 문명의 흐름은 디지털로 변화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아날로그를 수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성적 코드인 IQ보다 감성적 코드인 EQ를 선호하게 될 것이란 역사가들의 주장은 설득력 있다. 남성의 권위적, 기계적, 정치적 코드보다 여성의 포옹적, 토론적, 문화적 코드가 역사의 대세로 다가온다는 미래는 그래서 진취적이다.


아날로그는 부드럽고 감성적이면서 비교가 쉽게 안 되고 다분히 곡선적이다. 반면 디지털은 뭔가 딱딱하고 견고하고 이성적인 것이면서 비교가 용이하고 직선적이다. 그래서 남자는 디지털에 가깝고 여자는 아날로그의 속성에 가까이 있다. 즉 아버지는 디지털적이고 어머니는 아날로그적인 것이다. 자궁의 메커니즘이란 가장 위대한 아날로그의 세계이다. 생명 그 자체가 아날로그이기 때문이다.


휴대폰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서 태어난 인간의 전유물이다. 문자가 통화의 양을 넘어선 것은 디지털이 아날로그에 우위를 점하는 결과이다. 소통의 욕구는 아날로그적이고 소통의 소유는 디지털적이다. 그래서 욕망은 아날로그이지만 소유는 디지털이다. 컴퓨터는 무수한 디지털과 무한한 아날로그의 복합체이다. 네트워크는 아날로그적 소통체계 속에 전환된 디지털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에 서열이나 우열이 있을까. 이들은 특정한 조건에 의해 서로 전화한다. 내유외강에서는 내부가 아날로그, 외부는 디지털이지만 외유내강에서는 외부가 아날로그, 내부는 디지털인 것이다. 육체의 건강은 아날로그적이지만 비만의 육체는 디지털적이다. 하지만 꾸준한 운동과 다이어트의 노력은 반대로 디지털을 아날로그화 시킨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내외를 구분하고 형식과 내용을 규정하며 과정과 결과라는 양 측면이다.


사랑이란 서로 강제하지 않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서로 조화를 이룬 상태이다. 이별의 아픈 과정은 아날로그에 가깝지만, 먼 훗날 추억은 디지털로 형해화된다. 연애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것이다. 집착과 수용이 서로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방법과 목적이 서로에게 관계하는 것이다.


정책은 디지털적이고 이의 개선을 요구하는 투쟁은 아날로그적이다. 디지털 불평등은 인터넷의 확산으로 생긴 계층 간 정보의 불평등 현상이다. 아날로그를 더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자유와 평등이 이 속성에 가깝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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