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물 해체의 역사
요즘 치과 가는 일이 흔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꺼리는 곳 중의 하나가 치과다. 가장 신경 거슬리는 곳이다. 감각이 가장 민감하게 작용하는 곳이다. 기계소리부터 다르다. 인간의 의식 기관에 가장 근접해서 내는 소리다. 마취주사 역시 눈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시각을 주눅들게 한다.
치아는 입의 대표 주자다. 입은 인간의 신체 중 가장 자존심이 센 곳이다. 입이 누군가에게 열림을 당한다는 것은 난감한 일이다. 취조를 당할 때, 고문을 당할 때, 말하기 싫을 때가 그렇다. 입은 몸의 입구이자, 의식의 통로다. 자아세계로 들어가는 출발점이다. 자신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열린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누워 입을 열 때 무장해제 느낌을 받는 것은 그래서다.
치아의 역사는 씹는 기록이다. 갈아 부수는 역사였다. 원형을 갈아 뭉개는 일이었다. 인간의 입은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고 문명을 갈아치웠다. 인간은 씹으면서 사회를 유지하고 변화시켰다. 씹으면서 의식을 독립시켰다. 현대 문명의 미식가들은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 산다. 전국의 이름난 먹을 것들이 인간 치아의 흔적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치아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치과의사만이 아니다. 달변가들, 정치인들, 진정성이 없는 무리의 사람들도 있다. 씹기가 무섭게 달콤한 것은 삼키고, 쓴 것은 뱉어냈다. 잘게 부서지는 것은 인간성이었고, 진실이었다. 타인을 씹는 것도 일이 됐다. 타인을 씹으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현대 인간관계의 단면이 된 것이다.
치아는 미학도 갖다 붙였다. 씹는 일과 별개로 너도나도 치아에 철사를 둘러대기 시작했다. 씹지 않고 제 위치에만 있어도 된다는 욕망이 일상화됐다. 씹는 일이 무시되면서 잇몸이 함께 방치됐다. 치아는 온전히 빛날지언정 잇몸은 상처투성이였다. 말 못 하는 잇몸은 치아로 감춰졌다. 미백 문명이 황금색 자연 지대를 지배했다.
치아는 문명의 뿌리이고 역사의 단면이다. 엔트로피의 숙명이기도 하다. 식욕을 둘러싼 시장 쟁탈 배경에는 인간의 이빨이 드러나 있다. 화학자 G. 타일러 밀러는 말했다. “사람 한 명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1년에 송어 300마리가 필요하고, 300마리의 송어는 9만 마리의 개구리를 먹어야 한다. 그 개구리는 2700만 마리의 메뚜기를, 메뚜기는 1000톤의 풀을 먹고 산다”
역사를 빻아온 치아는 가장 배타적인 신체기관이다. 각종 도구가 발달했어도 대대손손 씹는 일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치석은 더욱 견고해졌다. 치석(플라그)은 문명이라는 찌꺼기의 퇴적물이다. 스케일링(Scaling)과 임플란트는 생명 연장의 비법이 됐다. 악어, 사자, 피라니아의 이빨은 인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최고 단계 포식자의 이빨은 여전히 욕망의 화신으로 날을 세우고 있다.
치과에 의존하는 우리를 발견한다. 문명에 길들여져 있음이다. 먹어치우는 일이 습관이 됐음이다. 메뉴는 늘 선택의 문제이지만 먹어치우는 방식에는 변함이 없다. 치과는 저작의 처리장이다. 음식물 저작과 문명 찌꺼기, 탐욕의 흔적이 거쳐가는 곳이다. 뷔페와 만찬, 넘쳐나는 음식물, 미식 행렬은 내일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