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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특별 May 13. 2022

[오늘의 일기] 화수분.

술집인가 쿠키집인가 정육점인가

스승의 날을 앞두고 좋아하는 모 교수님과 그 추종자들 몇명이 모여 을지로3가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개인적으로는 서식지나 근무지 모두 거리가 있어서 강북에 갈일이 거의 없는데, 아주 오랫만에 가보게 된 것이다. 게다가 힙지로를 처음으로 가본다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힙지로를 잘 아는 후배가 예약한, 힙지로 입구인지 끝자락인지에 위치한 참숯늑간이라는 곳을 1차로 방문했다. 소갈비살과 차돌박이를 숯불에 구워먹는 곳이었고, 곁들여먹는 무우생채와 상추 겉절이까지 모든 것이 맛이 매우 좋았지만, 죄송하게도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니다. 


맛있는 소고기로 배를 채우고 나니 힙잘알 후배가 2차로 갈 곳이 있다며 일행을 이끌었다. 참숯늑간에서 10분 정도인가 걸어서 도착한 화수분. 입구를 보니 야외테이블 3개가 펼쳐져 있었고 이미 만석이었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호프집 모습이었다. 


5월의 밤날씨가 더없이 선선하고 상쾌해서 직원분에게 테이블 하나를 밖에 더 펴달라고 채근했으나, 이 곳만의 룰이 있어서 더 펼 수가 없다고 소곤거리신다.(화수분과 마주보고 있는 술집이 두어개 더 있는데, 그들도 각각 2~3개씩 야외테이블을 펼쳐놓고 있었고, 그 이상은 서로 야외테이블을 자제하자는 룰이 있는 모양)


어쩔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가서 앉았는데, 힙잘알 후배가 여기는 육회와 육사시미가 말도 안되게 맛있다며 꼭 먹어야 한다고 고집한다. 참숯늑간에서 먹은 소고기 냄새가 몸에 아직 남아있는데 육회를 또 먹는다니 몹시 신이 났다. 


<먼저 나온 화수분 육사시미. 메뉴판에 한우투뿔이라 표시되어 있다>

육사시미가 먼저 나왔는데, 소고기 때깔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흔한 동네 호프집인줄 알았는데 어쩜 소고기가 이렇게 질이 좋은것인지. 와사비를 올리고 기름장을 찍어 입에 넣었더니 눈으로 느낀 그대로 맛과 식감이 동일하게 입속으로 이어졌다. 이미 소고기로 배를 채웠지만 이런 소고기는 얼마든지 내 뱃속으로 더 채워넣을 수 있었다. 


<두번째로 나온 육회. 사진을 보니 또 먹고 싶어진다>

막걸리와 소주 맥주를 번갈아 마시다보니 두번째로 육회가 나왔는데 이 역시 몹시 훌륭했다. 개인적으로는 마늘과 계란 노른자가 비벼진 육회가 와사비를 올려먹는 육사시미보다 마음에 들긴 했으나, 육사시미건 육회건 이미 이집의 음식은 내가 먹어본 어떤 육회집의 것들보다도 넘사벽 수준으로 맛있었다. 요리왕비룡의 美味를 온몸으로 외치고 싶었다.


 <맛있어!!>

게다가 애피타이저 형식으로 나온 소고기 미역국 맛도 훌륭했다. 아무래도 이집 사장님께서는 소고기를 보는 안목이 무척 높으시거나 또는 실제로 정육점을 하고 계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내친김에 힙잘알 후배가 육전도 시켰다. 소고기에 얇게 계란물을 입혀 팬에 식용유를 뿌리고 굴려낸 것인데 소고기가 좋다보니 역시 美味. 게다가 서비스로 새우튀김과 생선튀김도 내어주셔서 내 몸을 흐르는 피는 어느때보다도 걸쭉해졌다. 



그런데, 화수분에서 가장 특이한 건 따로 있었다. 동네 호프집 비주얼의 술집에서 전국 최고 수준의 육회와 육사시미를 내는 것도 신기한데, 이건 또 뭘까. ↓↓↓↓↓

<술집이.. 수제쿠키..???>

화수분 안쪽 화장실 쪽 벽에 붙어있는 위 액자를 보고 잠깐 머리에 랙이 걸린듯 했다. 순간 쿠키에도 소고기가 들어가는줄 알고 눈을 비비면서 들여다봤으나, 실제 우리가 아는 재료로 만들어진 수제 쿠키라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고기를 먹고나서 된장찌개에 밥을 먹는것에 익숙한데, 생각해보니 서양사람들은 고기를 먹고나서 쿠키도 먹을 것 같았다. 


그렇게 칠죄종 중 하나인 gluttony가 이미 소고기로 가득찬 내 안에서 눈을 다시 번쩍 떴고, 당장 직원분을 소환했다. 내 탐식을 멈추기 위해서였는지 다행히도 지금은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한껏 기대로 가득찼던 우리 테이블은  예전에는 사이드디쉬 개념으로 나왔던 것 같다고 힙잘알 후배가 종알거리는 걸 들으며, 언젠가는 이곳에서 꼭 쿠키를 먹겠다고 다짐했다. 


전영택의 화수분은 가난이 압도하는 소설이지만, 이곳 화수분은 고기와 술이 넘치는 주지육림이다. 화수분은 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를 뜻하기도 하는데, 여기 을지로 화수분은 내 지갑에서 돈이 계속 나오는 곳이다. 언젠가 다음번에도 내 지갑은 여기서 화수분처럼 열릴 것 같다. 
























덧.

자정을 넘기고 40분 넘게 좀처럼 잡히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진고개가 있었다.  


진고개는 내가 2006년에 가봤던 식당이다. 당시 불고기를 먹고 동치미국물에 소면을 말아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와 동일한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노포스러운 글자체와 힙한 색깔의 네온싸인 간판이 새삼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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