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노가더 일기 3
건설 현장에서 가장 싼 일당을 받는 일이 신호수일 겁니다. 일반 잡부 일당보다 1~2만 원 적게 받으니까요. 인력소 소장도 배정하는 일이 신호수일 때는 미리 분명한 언급을 주는 편입니다. 배정받은 당사자는 안도와 불만이 교차합니다. 다른 일에 비해 근력이 필요 없는 쉬운 일이라는 안도. 만만치 않은 체력이 필요한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일당에 대한 불만. 저의 경우 불만이 훨씬 큽니다. 운이 없으면 종일 매연을 마셔가며 허수아비처럼 서 있어야 하는데 정말 그런 고문이 따로 없습니다. 한여름 땡볕이나 한겨울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아야 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지요.
가끔은 신호수 일이 반가울 때도 있습니다. 조공이나 잡부로 나갔는데 현장 상황에 따라 잠시 두어 시간 신호수를 봐야 할 때가 그렇습니다. 그 정도라면 예상치 못한 순간의 달콤한 휴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일당도 제값으로 받으니 일석이조겠지요.
작년 이맘때 나갔던 한 현장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아침 먹자마자 커피 타임도 없이 일을 시작하길래 속으로 툴툴거리고 있는데 오전에는 신호수를 봐달라는 말에 얼굴에 웃음기가 절로 돌았습니다. 그것도 현장에서 한참 떨어진 골목 입구에서 신호봉 옆에 차고 혼자 조용히 서 있게 되니 이건 뭐 광화문에 선 이순신 장군이라도 된 것마냥 의기양양해졌습니다. 새벽이 아침으로 바뀌는 시간. 정적이 골목을 휘감았다가도 이따금 차 한 대가 제 앞을 스쳐 갔습니다. 이 작은 골목으로 들어올 차는 없어 보이는데? 귀에 이어폰을 꽂고, 팟캐스트를 들었다가, 음악을 들었다가, 어깨를 흔들었다가, 다리를 흔들었다가, 국민 체조도 잠깐 하고... 아차! 하는 순간, 등 뒤에서 경적을 울리며 골목을 나서는 차에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흔한 말로 저는 꿀을 빨고 있었습니다.
문득 백여 미터 떨어진 길 저편에서 세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습니다. 요란한 손동작과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보니 한눈에 봐도 취객들이었습니다. 새벽의 경건한 공기를 지키던 이순신 장군이 보기에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그들의 보법은 형편없었습니다. 적이라면 단칼도 아깝고 아군이라면 목을 쳐서 군기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만, 그때 저는 그들이 조용히 지나쳐 갔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담아 조용히 신호봉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현장 소음 등의 문제를 애꿎은 신호수한테 호소하는 주민이 종종 있기 마련이거든요. 꼭 그런 일이 아니라도 새벽부터 술 취한 늑대들에게 저는 좋은 먹잇감으로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형편없는 보법만큼이나 형편없는 속도로 다가오던 그들은 어느 순간 축지법이라도 쓴 것처럼 제 옆에 성큼 다가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그들의 모습에 조금 놀라고 말았습니다. 우선 취객으로 보였던 그들의 모습은 가까워지고 보니 아무리 봐도 중년의 부부와 나이가 찬 딸로 이루어진 가족이었습니다.
제가 놀란 것은 그들이 전혀 평범한 가족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살짝 감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부부는 손을 맞잡고 왈츠인지 탱고인지 모를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시력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경쾌한 속도의 그 행위가 보행이 아니라 춤의 스텝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저는 신호봉으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지적장애가 있어 보이는 딸은 난해한 현대 무용을 펼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찌 보면 부모의 길 안내 역할인 듯하다가도 더 과감한 스텝으로 부모가 그리는 춤 선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가족이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분명해 보였다는 것 말고는 말이죠. 정적 속에서 그들은 그칠 줄 모르는 자신들의 웃음소리에 맞춰 춤을 추며 새벽의 길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바로 제 옆을 지나고 있었죠. 슬픈 장애를 가진 그들이 그토록 행복해하는 것이 로또를 맞아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술에 취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단지 새벽 기도를 다녀와서인지... 짐작조차 하기 힘듭니다.
신을 믿지 않지만, 어떤 신성한 것을 목도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귀에서 이어폰을 뽑고 한동안 그들을 지켜봤습니다. 그들이 다른 골목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저의 건강한 망막에 여운으로 담긴 그들을 한동안 지켜봤습니다. 신이 있다면 아주 잠깐, 그 늑대와 개의 시간을 아주 잠깐 열어서 “행복이란 이런 것이야.”하고 내게 보여준 것만 같은데, 저는 도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불행과 행복이 왈츠처럼 뒤엉켜 있는 그 황홀한 광경이 담긴 시간의 진정한 의미를...
2024/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