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다 캐럴

초보 노가더 일기 5

by 푸레카

"이제 곧 찬 바람 분다."


예전에 다녔던 인력소 소장이 제게 했던 말입니다. 반복되는 신호수 배정에 불만을 털어놓자 소장이 제게 으름장을 놓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윈터 이즈 커밍!”이라고 한 것이죠. 그 후로도 늦가을쯤 되면 어디선가 “슬슬 찬 바람 분다.”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는 걸 보면 노가다 판의 관용어쯤 되는 것 같습니다.


겨울은 노가다 판에서 그 자체로 비수기를 의미합니다. 영하의 추위에서는 공구리가 잘 굳지 않기 때문입니다. 방풍, 보온 시설을 갖추고 열풍기와 고체 알코올을 동원하면 되지만 비용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안전상의 위험이 커지는 것도 부담스럽습니다. 눈이 내리면 쌓여도 문제고, 녹아도 문제고, 얼어도 문제입니다. 맑은 날이 지속되어도 자재는 물론 쓰레기까지 얼어서 땅에 붙어 버립니다. 전력 사용량도 많아지기 때문에 전력 문제도 생깁니다. 건설사 입장에선 굳이 무리할 이유 없이 겨울에 작업량을 줄일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 전 그런 걱정으로 떨고 있을 무렵, 평소 조금 친하던 반장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고정으로 나가는 현장이 없으면 자기가 지금 다니는 현장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저는 반가운 와중에도 우선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누구누구 있는데요?”


총 4명이 나가는 현장이었고, 저를 제외한 3명의 이름이 모두 마음에 들었습니다. 한 주에 사나흘씩 대마를 맞는 상황이었는데도 굳이 그런 것을 확인한 걸 보면 저는 아직 ‘초보’ 노가더가 맞는 듯합니다.


자재 정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로 사뽀도(지지대)와 유로폼을 정리해서 쌓아 놓으면 크레인을 불러서 최상층으로 올리거나 반출하는 일이죠. 사뽀도와 유로폼이 만만치 않게 무겁기 때문에 힘든 일에 속합니다. 크레인 없이 순수 인력으로 자재를 올리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힘들기만 한 게 아니라 위험하기도 합니다. 공사 기간이 길면 길수록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체력과 근력이 좋아야 하고 성격도 맞아야 하니 멤버 교체가 잦을 수밖에 없지요. 자재 정리 인원이 1명에서 4명으로 늘어나는 동안 여러 번의 교체가 있었고 제가 마지막 멤버였습니다. 듣자 하니, 하루이틀 나오다 떠난 사람까지 하면 십수 명은 거쳐 간 것 같았습니다. 이대로 고정 멤버가 되면 3월까지는 대마 걱정 없이 일할 수 있게 된 거라고 보면 됩니다.


그렇게 겨울을 맞아, 지난 크리스마스이브였습니다. 최고참 반장님이 점심시간에 용역 인원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무슨 얘긴가 싶었죠. 최악의 경우는 멤버 교체 건일테고, 차악의 경우는 멤버 감축 건이라 생각했습니다. 뭐 그런 일이야 노가다 판에서 다반사니 감축 건일 경우 마지막에 합류한 제가 나서서 나가겠다고 말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3주 정도 대마 안 맞고 잘 벌었으니 됐다, 싶었죠.


들어보니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고정 멤버 4명이 돌아가면서 하루씩 쉬고 그 자리에 다른 1명을 불러오자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요새 일이 워낙 없으니 놀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나눠 먹자는 것이지요. 아~ 감동이어라. 어디선가 크리스마스캐럴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혹한의 냉기와 어둠이 가득한 공사판 지하에 모닥불의 온기 같은 숙연함이 4인 노가더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우리는 마음 한편에 미안함을 묻어두고 있었습니다. 겨울에 들어 인력소에서 고정으로 일을 나가는 현장이 두어 개 밖에 없는 데다가 그중에서도 4명이나 출력하는 곳은 이 현장뿐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었거든요. 평시에 출력 인원이 최소 30명에서 많게는 80명까지 되던 것이 15명으로 줄었으니 그 많은 인원이 지금은 어디선가 ‘찬 바람’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부터 제5의 멤버로 오신 반장님은 나이가 좀 많으신 걸 빼면 체력, 근력 모두 젊은 이들 못지않으시고, 단지 하나 문제가 성격이 너무 과묵하신 편입니다. 원래 말이 없으신 편인데 점점 더 없으시네요. 아마 처음 며칠은 평소처럼 일을 나오다가 곧 눈치채신 것 같습니다. 이놈들이 뭔가 야로가 있구나... 하고. 스크루지 영감 같은 표정으로.


반장님... 죄송하지만 당분간 저희들의 따뜻한 겨울을 위한 땔감이 되어주셔야겠습니다.


2025/01/05


제주항공 참사 희생자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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