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노가더 일기 6
노가다판은 빌런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처음 노가다판에 발을 들인 신참은 대번에 느낄 수 있습니다. 새벽의 노곤함을 번쩍 깨게 만드는 악의에 찬 눈빛과 말투들. 어떤 때는 차라리 악의가 기꺼울 만큼 무섭고 무심한 대우나 처사들. 앞서 쓴 저의 글들에서 묘사한 노가다판의 정은 뭐냐고요? 교전 중에 전쟁터에 막 도착한 신병의 눈에 그런 것들이 보일 리가 있나요.
가만 생각해 보니 노가다판이 전쟁터보다 더한 경우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료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만 보니 이 사람이 신참인데 결국 같은 일당을 받아가는 상황이 아니꼬울 수 있거든요. 일은 내가 두 배로 세 배로 했는데 일당은 똑같은 겁니다. 심지어 인력소에서 일을 배정받을 때는 서로 경쟁자이기도 하네? 얼른 일을 마치고 5분이라도 더 쉬고 10분이라도 일찍 가고 싶은데 얼뚱 멀뚱 서 있는 신참이 옆에서 걸리적거리기라도 하면 말이 곱게 나가지 않습니다.
사업주나 관리자들의 경우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일 못하는 사람한테 똑같은 일당을 주어야 합니다. 인력소 소장한테 전화라도 걸어야 할 판입니다. “저 사람 내일은 빼주세요.” 하고. 저의 경우 어느 철거 현장에 나갔다가 하루종일 쏘아보는 사업주의 눈빛 때문에 아주 곤욕을 치른 일이 있습니다. 담배 타임에 혼자 떨어져서 음악을 들었다는 사소한 이유로 말이지요. 일도 못하는 놈이 담배도 안 피우니? 농땡이 치는 걸로 보였던가 봅니다.
“귀인을 만났어.”
어느 날, 그러니까 이제 제가 노가다판에서 신참 티를 조금 벗었나? 했을 무렵, 한 반장님이 담배 타임에 제게 뜬금없는 썰을 풀었습니다. 며칠 전에 같이 일한 사람이 귀인이었단 겁니다. 그런데 왜 귀인인가에 대해서는 딱히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명문 법대 교수 출신이었다는 것 말고는. 그래서 제가 코웃음을 쳤는데.
“사람이 아주 됐어. 점잖고. 말도 아주 잘하고. 우리를 낮잡아 보질 않더라니까.”
저와는 인연이 없는 모양이었던지 전직 교수라는 그 사람을 저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인지 겪어보질 못했으니 그가 정말 귀인이었는지 어떤 귀인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죠. 앞서 제가 코웃음을 친 이유가 있는데 교수 출신 노가더를 저도 다른 인력소에서 만나본 적이 몇 번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 머리 없고, 농땡이 치기 좋아하며, 담배와 전화통을 붙들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또 다른 의미의 빌런들이었을 뿐, 귀인과는 절대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새삼 깨달은 것은 노가다판에 들어오기 전에도 귀인을 만나본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정말 내가 귀인을 만나본 적이 없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귀인을 알아볼 안목이 없으면 눈앞의 귀인을 알아볼 수도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시간이 지날수록 막연한 확신이 되어가고 있죠. (현재도 진행 중이랄까요.) 확신이라면서 막연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아직도 여전히 귀인이라고 생각할 만큼 대단한 귀인을 만나본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귀인’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사회적 지위가 높고 귀한 사람”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약간 종교적?인 의미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봅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 뿐만 아니라 ‘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니 뭔가 주관적인 가치 평가(안목)가 필요해 보이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5천만의 사람들이 안목을 다해서 뽑은 대통령마저 천박해 보이는 이 시대에... 과연 귀인이란 세상에 '존재 가능한' 사람인지 궁금해지네요.
귀인을 만났다는 그날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 언젠가부터 묘한 버릇이 생겼습니다. 지금 내 앞의 이 사람이 귀인인가? 하고 마음속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빌런이 넘쳐나는 노가다판에서 그런 생각을 오래 하다 보니 점차 어떤 안목이 생겨난 것도 같습니다. ‘생겼다’기 보다는 ‘낮추었다’로 표현하는 게 맞을 거 같습니다. 오늘 같이 일하는 반장님이 내일도 같이 일할 만한 사람이면 이 사람이 ‘귀인’이 아닐까 하고, 아니 ‘귀인’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또 한편으로 제가 누군가에게 귀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하고요.
물론 대통령에 대한 안목을 낮출 수는 없습니다만.
2025/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