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의 삶 3

by 이순미

16. 이병태/조화옥. 9.3. 마을방앗간에서

61세(56년생)/55세(61년생)

건설업 하다가 지금은 농부, 화옥 씨는 아파트마케팅 및 세일즈

이 집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강동이 고향이다. 부부가 기독교 신자이다.

1녀 1남이다.

81년도에 나가서 2011년도 11월에 들어왔다.

다시 고향에 들어와서 안 해본 농사를 배워가며 일하는 것이 힘들었다.

지금 농사 외에 마을두부제작 등 소일거리가 있고 서로 모여 얘기 나누고 어울리는 것이 재미있다. 마을일에 적극 참여하고 있어 보람이 있다.

마을의 미래에 대하여 생각은 많으나 말로 바로 표현이 안된다.


17. 김희도. 9.3. 방앗간에서

64년생. 고향은 경남 산청. 종교는 기독교.

건설업. 부인과 1남1녀

마을에는 2015.12월에 들어왔다.

혼자서 사니까 때로 적적하다. 바깥일과 농사일을 병행하다 보니, 일이 자꾸 밀려지고 제때 못하고, 농사경험이 없으니 우물쭈물해진다. 처음에 환경도 주민들도 낯설고 불편했다.

하고 싶었던 농사를 직접 짓게 되어 재미있고, 마을인심과 경관이 참 좋다. 이제 같이 마을 일을 할 수 있게 되어 보람 있다. 이제 안정이 된다. 마을이 환경은 참 좋은데, 방치된 곳들이 이곳저곳에 있어 안타깝다. 젊은 피가 마을에 들어와 생동감 있고 변화가 일어나면 좋겠고, 이 속에서 나도 뭔가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18. 강락중/이태자. 9.3. 방앗간과 집에서

57년생/61년생

고향은 신광 상읍1동, 태자 씨는 포항 우현동

종교는 없다.

회사원으로 올해 퇴직했고, 태자 씨는 20년간 미용실을 경영했다.


강락중

성읍에서 중1 때 시내로 이사 나왔다. 평소에 전원생활을 동경했고, 전원주택을 보러 2년간 토, 일요일이면 돌아다녔다. 봉화, 영천까지 가보았다. 2014년 4월에 주위에 개나리와 벚꽃이 활짝 핀 이 집을 보고 두 사람이 한눈에 반했다. 며칠 만에 바로 계약하고 5월에 이사했다.

나는 힘든 것이 없는데, 아내는 끌려오다시피 해서 적응도 잘 안되고, 방황하고 있다. 아내가 힘들어하니까, 나도 부담이 된다.

나는 원래부터 전원생활을 동경했고 은퇴 후 살 집을 물색하다가 결국 고향 근처로 찾아 들어왔다. 마을에서 새 친구들 사귀고, 공기 좋은 데서 스트레스 없이 사니까 좋은데, 시간이 갈수록 다져지고 재미있다. 또, 전에는 감기를 자주 했는데, 우각에 들어와서 감기도 거의 안 걸리고 건강이 좋아졌다.

주민들이 화합하는 장이 마련되어 서로 잘 지내면 좋겠다.

마을이 더 알려지면 좋겠는데, 이 일도 노력해야 할 일이다.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소일거리가 되고 수입도 되는 일거리가 마을에 있으면 좋겠다.


아내 이태자

나는 언제 고간에 이곳을 뜬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농촌생활이 텃밭농사도 다 부담된다.

전에 미용할 때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신랑이 원해서 이곳에 이사와 짐정리하고, 신랑이 출근하자 눈물이 쏟아졌다. 낯설고 무서웠다. 농사도 정말 부담되고 스트레스다. 땅이 너무 넓어, 점점 방치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책임을 안 하고 있는 것 같아 큰 스트레스다.

공기나 경관이 너무 좋다. 청명한 밤에 별과 달을 보면, 특히 보름날 나무사이에서 휘영청 떠오르는 달을 보면 정말 아름답고 감동적이어서 둘이 보기 너무 아깝다. 또, 올해 그토록 더웠는데도, 저녁 8시면 산에서 찬바람이 솔솔 내려온다.

올해 그린빌리지사업으로 우리 집에도 태양광발전기 설치했다. 전기요금이 에어컨을 낮시간동안 빵빵하게 틀면서도 지난달 전기요금이 6,000원가량 나왔다. 사실 업자 딱 한 번 보고 서류해 주고 설치비용을 입금하라고 하니, 못 미더워서 남편은 만약, 이 태양광사업해 놓고 문제 생기면 이장님은 이 마을 못살고 쫓겨나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포항시청과 에너지관리공단에 전화해서 자세히 확인하고 비용을 납부했다.

남편이 내 마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니, 놀랍다.

벚꽃마을 분양되고 변화되는 것 봐서 결정하려고 여유 있게 살기로 마음을 돌렸다.

만약 이곳을 떠나서 다른 곳에 살더라도, 평생 이곳을 그리워할 것 같다.

문제는 넓은 땅과 농사가, 특히 풀 없이 깨끗하게 밭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스트레스가 문제네요. 그건, 나무를 심어 산울타리를 만들고 그 너머 밭은 잊어버리고, 집 주변의 거주영역만 신경 쓰고 살면 되겠네요?


19. 모아댁 이규필. 9.5. 집

80세

아들 2, 딸 3

21살에 이 집으로 시집왔다. 그해 8명이 이 마을로 시집왔는데, 외모가 법동댁 며느리가 1등이고, 내가 2등이라고 했다. (그 무렵 안강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이 벽에 있는데, 영화배우 못지않은 미모시다.) 아들 둘, 딸 셋을 두었다.


시집오니 안 어른 만 계셨다. 시집와서 아기를 바로 못 낳았다. 친정어머니가 온갖 것 좋다는 것은 다 해주셨다. 태기가 없다 보니, 동제사를 몇 번이나 지냈다. 어른이 정성 스러이 준비하셨다. 변소 갈 때도 변소 앞에서 신발 벗고 들어가서 다른 신발 신고, 나와서 다시 그 신발 신고, 하루에 1번씩 옷 갈아입으셨다. 주인양반도 그 정월에 큰 거랑 가서 하루 1번씩 목욕하고 옷 갈아입었다. 동제사 지내고 태기가 있어 8년 만에 큰아들 낳았다.


주인양반이 술을 좋아해 밤이고 새벽이고 함께 모여 술 마시고 노름하고, 집에 분탕지기고 해서 싸우기도 많이 했다. 보리농사, 밀농사 지어서 마당에서 발로 밟아 타작했다. 뒤주를 마당에 내놓고 술독을 뒤주 안에 넣고 타작한 밀을 위에다 덮었는데, 조사하러 나온 사람한테 들켜 벌금을 내기도 했다. 1년에 누룩을 100장씩 띄웠다. 골목에 낯선 사람들이 오면 누룩이나 술 숨기느라 바빴다. 시집와서 얼마 안 된 때 이야기다. 주인양반도 좋아하지, 상머슴도 있지 해서 거의 매일 술을 담갔다. 하루는 영감이 술독을 이고, 면에까지 가자 해서 목이 빠지게 그 술독을 이고 면까지 따라갔다. 꾀도 없이, 요즘 같으면 좀 가다가 미끄러지는 척하고 술독을 논에다 엎어 깨 버리제, 그때는 그러고 힘들게 면까지 갔다. 술자시고 뗑깡 부리고 해서, 하루는 이래 계속 살 수는 없다고 보따리 싸서 친정 가겠다고 마음 단단히 먹고 나서다가, 학교 간 큰 아들 진이 보고 간다고 기다렸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보고는 또 눌러앉아 살았다.


주인양반이 술 마실 때 외는 농사도 열심히 짓고, 안어른도 여물게 아끼고 살으셨다. 농사짓는 것이 어찌나 힘들던지, 참 마련해 가 머리에 이고 큰길 건너 논까지 갖다주고 어찌나 힘들던지, 내가 주장해서 논 11마지기 팔고 어머니 돈 합쳐 포항시내에 2층집을 샀다. 좋은 방은 다 남 세주고, 부엌도 없이 방 안에서 밥 해 먹는 제일 못한 방에 안어른이 고등학교 공부하는 손자 뒷바라지해 주셨다. 어른은 친정이 내남 둥그리 천석꾼집인데, 여기 시집오셔가 고생 많이 하셨다. 시집온 이후로 차멀미로 친정에를 한 번도 못 가셨고, 신랑은 병이 있어 따로 살고 밥 해 나르고, 양어른 모시고 살았다. 어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큰 아들은 며느리가 고속터미널 근처에서 식당 하고, 아들은 버스운전한다.

큰 딸은 경주선덕여상 다녔는데, 어느 날 딸 보러 갔다. 새벽에 딸애가 나가길래 보니, 자전거 타고 신문배달을 다녔다. 졸업하고 성모병원에 취직해서 1년 다니더구먼, 공부해야겠다고 간호대학 시험을 보고 3년을 장학금 받아 다녔다. 집에서 보태준 것 없이 공부 잘하고 부산동아대학병원에 취업해서 결혼하고 수간호사로 근무하고 애들 키우고 잘 살고 있다. 작은아들은 유강에서 카센터를 하고 있다.

8.15 신광면 축구대회할 때, 작은 아들이 씨름을 3년 연속 1등을 했다. 한 번은 몸집 큰 사람하고 붙길래, 이번에는 졌구나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덩치 큰 사람을 눕혔다. 어찌나 좋고 신나던지 내가 춤을 다 췄다. 온 동네 사람들한테 인사 듣고 재미있었다.

두 아들이 8.15 축구대회 때마다 거의 온다.


내가 죽거들랑 느그아버지 산소 파서 한데 화장해서 어디다 흩어버리든지, 흘려보내라. 그리고, 큰 며느리는 절에 다니고, 작은 며느리는 교회 다니는데 어째든지 우애 있게 잘 살아라. 니 희 하는 대로 따라가그라.


20. 이희상. 9.5. 풍로공장

53년생, 경남산청이 고향이고 부산에서 살았다. 가끔 절에 다닌다.

풍로생산 및 판매

부인과 아들 1명

2010.8월에 공장을 완공했다.


처음에는 주민들이 인사도 안 받아주었다. 차차 인사도 받아주고 어울려진다.

전에는 어버이날 잔치하면 찬조만 하고 참석은 못했고, 주말에는 부산집에 갔다.

옛날보다 마을이 깨끗해졌다. 지금은 이야기도 나누고 술도 한잔씩 하고 마을 사는 재미가 생긴다. 동네분들이 순박하시다. 술을 심하게 마시는 사람도 없고, 이러니 저러니 뒷말하는 분도 없으신 것 같고, 다들 자기 일 충실히 하면서 살고 계신 것 같다. 동네분들 좋다.

공장지붕에 태양광발전시설을 하였고, 나머지 부지에도 한다.

비어서 쓰러져가는 집들이 정리가 되면 마을이 더 좋아 보이겠다. 또, 마을방앗간에서 가끔씩 검은콩두부도 만들면 좋겠다.


21. 이지원/강옥순. 9.5. 집

77세/72세, 아지매는 친정이 신광 기일, 감로사 다니다 아저씨가 몸이 아파 중앙교회 4년 다녔다. 시동생 3명이 있는데, 우리가 교회 다니는 것 좋아하지 않는 눈치여서 시아바시 돌아가시고는 그만두었다. 지금은 무교.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에도 부자가 몇 집 있었다.

아저씨는 지금 백정애 씨 사는 집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자도 많았고, 가난한 사람도 많았다.

예전에 동회관이 ㄷ자로 높았다. 마을회관옆에 종갓집도 겹 입구자 형태였다.

고지기(만당에 올라가 마을 일을 외는)를 기억에 3 사람 겪었다.

원래 우리 마을이 경주고을이었고, 우각, 우계 동이었다. 일제 때 소우 뿔각으로 바꿔버렸다.

6.25 동란직전 48,49년도가 아주 혼란스러웠다. 6.25 이후 중년이 2년가량 들었는데, 거의 무정부상태였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의 군량미를 누가 댈 것이냐? 조정에서 이회재의 손자를 시키자 결정해서 양동 무첨당에 왕의 친필이 든 유새통을 들고 관리가 왔는데, 무첨당 맏백씨가 건강이 안 좋아, 우리 할아버지가 대신 자원하자, 테스트를 거쳐서(축지법등) 군량도감 제수받고 군에 종사했다. 위로 4 형이 있었고, 우리 할아버지는 다섯째로 재취로 시집온 월성손 씨 손우재 증손녀인 재취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임진란 당시 17세로 청송 안덕 조종남증손녀에게 장가들은 상태였는데, 혈손이 나고 할머니 조 씨는 일찍 사망하였다. 우리 할아버지가 임진왜란 당시 쓴 용사일기가 큰 집 무첨당에 있었는데, 서자가 두드러지는 것이 달갑지 않아 형 4명이 용사일기를 넷으로 나누어 없어졌는데 3번째 책이 남아 있어 그 책을 가지고 오의공문집을 편집했다. 온전하지 않아 3번 편집을 했다.


할아버지 성함은 이의온, 자는 오의, 호는 이온, 형들은 이의잠, 이의찬.. 등이었다.

나라에 공을 세워도 서자라고 따돌림을 당하니 좀 떨어져라 해서 살 곳을 찾아 이곳에 입향하게 되었다.

입향조인 오의공 아래 외동으로 2대를 내려왔고, 그다음 대에 3형제가 났으니, 그 후손들을 각각 내동파(안골파), 향파(거리파. 코오롱 윗대, 우각2리에 정자 2개가 다 이 소속이다), 사오당파(개오댁 윗대, 큰집이 냉수 2동에 있다)라 한다. 상처 후 재취로 온 창녕 조 씨 할머니는 딸밖에 없었고, 3번째 처인 봉화 김 씨 할머니는 4형제를 두었는데, 2 형제는 행방불명이고 2형제는 장대이에 거주한 안포공(이영자 아지매 윗대 할배), 그리고 주탄?공 이다. 또 서자라고 차별이 좀 있었다.


과거에 오의공 자손한테 정부에서 기별한 것이 거의 무첨당에게 보내졌다 한다.

계룡참봉댁(이안댁?)에는 연당이 있어 연꽃도, 붕어도 있었다. 천석꾼들 집 주위에 보면 대나무가 심겨 있다. 지금 그 대밭이 200평은 될 텐데, 여름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라고 심었다. 나락도장과 전곡도장이 따로 있었다. 동민이 글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한다. 오의정자리에 원래 서당이 있었다. ㄷ자로 건물이 좋았다. 우각 2리를 장대이라고 부르는데 원래 이름은 장당이다. 들복판에 서당이 있었는데, 200평가량이었다. 서당이 있으면서 그 주위가 넓어서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 즉, 장터의 장과 서당의 당이 합쳐서 장당이라고 하였다.

마을에 전기, 전화는 흥해하고 같이 들어왔다. 갑을교는 코오롱에서 만들어주었다.

-이장으로 계실 때 수도랑, 도로포장이랑 마을 일을 많이 하셨다면서요?

포항시 수도는 1999년도에 넣었다. 한 집에 2,000원씩 부담했다. 그전에 마을수도는 고장 나고, 틀어주어야 하고 번거로웠다. 수도공사할 때 파이프 보러 부족한 연결고리 사러 오토바이 타고 가다 죽을 뻔했다. 마을회관도 99년도에 지었다. 마을진입도로는 힘들게 신청했다. 다음 해 이장을 그만두고 난 뒤 포장공사를 했다.

농산물이 너무 값싸고 생산비가 25% 들어가니, 수입이 자꾸 줄어든다. 시골에 귀농하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면 좋겠고, 농토를 묵히지 않고 뭐라도 재배하면 좋겠다.

임진란 당시 200 열사에 대한 제사를 경주에서 해마다 양력 6.9일에 올린다. 우리 마을에서 오의공 후손으로 이태섭선생과 내가 정회원으로 거의 매년 참석한다.

-마을 역사에 대해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자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남에게 베풀어라. 베풀었거든, 바라지 마라.


22. 박오광. 9.7. 공부방

54년생(63세), 고향은 송라, 지곡동, 불교

전직 포스코사원, 가족관계는 부인과 1남1녀

우각에 밭이 있고, 혼자 조용히 초기 부처님 말씀을 공부할 집을 찾고 있었다.

이장 사인을 받을 일이 있어 왔다가 이장집 뒤 봉계댁 살던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방치되었던 집 내외 쓰레기를 1달간 청소하는 일이 힘들었다.

원하는 위치, 분위기의 집을 구해서 무난히 정착하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된 일이 기쁘다.

이 마을에 공부하러 왔다.


다른 모든 농촌마을에서 다 분리수거되는 줄 알았는데, 우리 마을에서 분리수거가 되고, 방앗간이 운영되기 시작한 것도 바람직하다. 주민들과 마을지도자들이 소통하니까, 마을의 힘이 모아지기 시작했다고 본다.

수트라(부처님 말씀을 한 권에 체계적으로 모은 것, 법을 총정리한 경전)와 니까야 경전(35세에 득도하시고 80에 돌아가실 때까지 45년간 설법하신 것을 그대로 모아놓음)을 공부하고 있다.


23. 백정애. 9.7. 집


63년생, 고향은 경주, 기독교(시내 교회와 우각교회)

직업은 학원강사, 남편과 1남1녀

2013. 7월 이사 왔다.

동네 안에 우사가 한 군데 있는 줄 알았는데, 최근 슬그머니 소마릿수가 늘어나는 것 같다. 저기압일 때 냄새가 많이 난다. 불편하고 또 우리 마을에 귀촌인구가 늘어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하천에 음식물이나 비닐쓰레기를 버리지 않으면 좋겠다.

어르신들이 살러들어온 젊은 사람들에게 하대하지 않고, 존중해 주시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마을회관 오가며 우리 집 텃밭농사 어드바이스해주시는 것도 고마웠다. 8.15 행사 때 아들, 며느리, 딸 사위들이 참석하는 것도 보기 예뻤다. 많은 시간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함께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이 보람 있었다. 누가 들어와도 어울릴 수 있도록 마을 분위기를 오픈했다는 점이 고마운 일이다.

마을 골목이 참 예쁜데, 이 굽이치는 골목을 잘 가꾸어 가면 마을투어길이 조성될 수 있을 것 같다. 마을에 쉼터, 즉 먹고 마시고 담소할 수 있는 공간, 뭔가 마을공방이 생기고 공방에서 만드는 작품이나 식품을 판매해서 수익이 나는 구조가 생기면 좋겠다.


24. 화전댁 월성이 씨?. 9.9. 집

84세, 기계화봉

어머니 돌아가시고 네 오빠밑에서 시집옴. 딸 1, 아들 4

19살에 시집와 보니, 시어머니, 신랑, 시누이 2명 단출하게 살고 있었다. 외동아들 신랑은 학교 다니고 있고, 농사일은 몰라 논도 남 줘 부고 글만 읽었다. 속아 시집왔다. 친정서는 호미 한번, 낫 한번 안 쥐어보고 컸다. 가만 보니 내가 다잡아 살아야 남의 집에 빌러 안 가겠구나 각오하고 살았다. 시어머니는 양자로 논 50마지기 있는데 양자 시집와서 30살에 시어른 돌아가셨다. 논 31마지기를 사기당해 날리고 고생하셨다.

낮에는 남의 집일, 밤에는 우리 집 일 하고 살았다. 시누이 2명도 옮겼다. 돼지, 염소, 토끼, 온갖 짐승을 다 먹였다. 먹여 키워 팔아 보태고, 또 키워 팔아 보태서 중소를 한 마리 샀더니 해마다 불어났다. 그렇게 해서 논 4마지기 사고, 집사고 했다.


계남댁 앞 집에 살다가 막내 5살 때 이 집으로 이사 왔다. 208평이라 심심소일거리로 꽃 키우고, 꽃을 참 좋아라 한다. 없으면 섭섭하니까 시래기거리며 키운다. 30살까지 살라나 했는데, 영감 7년 전에 79에 돌아가셨다. 방금 아들이 출근길이라며 추석 때 쓰라고 돈을 주고 갔다.

딸은 중학교, 아들들은 고등학교까지 보냈다. 큰아들이 재주 있어 공부를 잘했는데, 서울대 가려고 공부했다고 해서, 네 동생들은 어떻게 하냐고 하고 학교 앞에서 모자간에 울었다. 딸은 국제결혼해서 미국 가서 잘 산다. 자식들 고등학교까지 시켰으면 그다음은 지들 책임이지. 아들들 결혼하고 논 팔아 집살 때 600만 원씩 보태주고 막내 빼고 논도 나누어주었다. 없으면 대소가부터 만만히 본다.

영감한테 니 소리 한번 안 들었다. 시어마시도 나보고 네가 욕본다며 쓰다듬어주셨다.

부자는 팔자에 냈고, 우리는 밥 먹고 살면 된다.

큰 아들은 58세, 아들 1 딸 2두었는데, 맏손자는 대학원서 낸 3곳에서 다 합격됐는데, 육사 나와 재작년에 장개갔다. 사관학교에서 결혼식 했는데, 구경할 만하더라.

조금 더 모두고, 자식들 공부시키고 열심히 살았다가 딸, 아들 다 결혼시키고 나서 60에 일 내버리고 편케 살았다. 밥만 먹고살았다.

며칠 전 친정모친 제사에 갔는데, 조카가 데리러 왔다. 제사에 쓰라고 돈 준비해 가서 주고 올케들, 질부들 고생한다고 또 준비해서 주고, 하니 나중에 조카들이 또 5만 원씩 고모 쓰시라고 준다. 이쪽에서 써야 저쪽에서도 맘을 낸다. 고모요, 걱정할 것 없니다. 우리 집에 없는 게 없니다. 검사, 판사, 교감, 등등.. 나중에는 둘째 조카가 데리러 와서 집까지 데려다준다. 전기밥솥까지 사다 주고 돌아선다.


25. 포항댁 이춘자, 9.10

친정은 포항, 감로사에 다닌다.

아들 2, 딸 2.

24살에 시집왔다. 가마 말고 택시 타고 들어왔다.

우리 마을에서 제일 많이 배운 아주머니라고 알려져 있다. 포항여고졸업하심.

아저씨가 내 35살에 병으로 돌아가셨다. 아들 데리고 산다고 고생했지. 살기 어려워 부인회 매점을 했다. 막걸리, 소주, 잡화등을 팔았다. 자식들 공단에 들어가 알아서 전문학교 다녔다. 얻어 쓴 것도 없다.

자녀들한테는, 여물게 살아서 부모한테 걱정 안 끼치면 된다.


-아지매가 두부기계하고 쌀 빻은 기계하고 있으면 좋겠다 의견내신 것 귀담아듣고 있다가 결국 행자부에서 공모한 마을공동체 활성화부문에 제안서 낸 것이 선정돼서 방앗간이 만들어졌어요.

*그건, 콩잎김치보다는 두부가 낫다는 뜻이었지. 그리고, 말나 온 김에 지금 우리 방앗간 두부가 다른데 4천 원짜리보다 크기도 작고, 비싸다는 의견들이 있다는 거 알제?


-두부값을 회의에서 아지매들 의견 들어 결정한 거고요, 이견이 있으면 회의에서 말씀하시고 다시 결정하면 되지요. 절대적으로 정해진 건 아니잖아요.


*이번 8.15 때 고기를 12 봉지나 샀다고 하던데?

-예? 8.15 행사준비 회의에서 마을주민들한테 옷을 해드리냐, 모자를 해드리냐 하다가 잘 먹는 것이 최고 말이 적다. 돼지 한 마리 잡자로 결정했는데요. 그때 아드님 영길 씨도 참석했어요.


*그건 아는데, 그것 말고 12 봉지 더 샀다는 소리 서울댁한테서 들었다.

-예? 그런 일 없는데요. 70만 원 주고 한 마리나 샀는데, 더 살 이유가 있나요?

회의할 때 입장상도 안될 거고, 상 탈 일이 없을 거로 보고, 아예 마을에서 푸짐하게 먹자로 결정했었죠. 또, 잔치 후에 나중에 상탄 것으로 먹으면 되는데, 왜 돼지를 샀냐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거야, 상을 탈 수 있을지 없을지 그건 미리 알 수 없지. 상품을 아무 상도 못 탄 마을에 주는 것은 잘했다. 입장상도 체육회장 덕분에 탄 거지.(입장식에 참가주민들 복장으로 하의 검은 바지, 하얀색 상의에 흰 고무신, 빨간색 태극기 목수건에 밀짚모자로 코디해 드린 나는 안중에 없고, 오직 체육회장님 덕분이라네)

-팔씨름도 장대이는 타도 우리는 상탄 적이 최근에는 별로 없다면서요. 종갓집에 이사 온 김희도 씨가 팔씨름에 나가서 4강에 들어갔다던데요


*혼자 잘해서 상탄 거는 아니지. 엽이랑 딸들이 잘했으니까 타지. 윷놀이야 탈지 못 탈지 어찌 아노?(이 대화를 기록하다 보니 나는 이주민에 초점을 맞추고, 아지매는 원주민덕택이라는 견해차이가 반복된다)

그럼, 일한 부녀회원들한테 고기 좀 나눠주는 건 할 수 있지. 몇 명이나 왔는데?

-전날 저녁에 온 사람, 당일 오전에 온 사람 열 사람이 넘었죠. 마을 일을 한 둘이 할 수 없으니 부녀회원들이 많이 나와서 함께 일하도록 저희 입장에서는 뭐라도 남는 것 있으면 나누고 싶지요.


*그럼, 12 봉지 샀다는 게 그 소린가 보다. 일한 부녀회원들한테 주는 건 그럴 수 있다. 선수로 뛴 사람들도 챙겨야 했지 않나? 엽이 같은 경우 말이다.

-저녁에 가족들 데리고 와서 먹었는데요.(윷놀이, 팔씨름에 나간 선수들 체육회장과 이장과 비학산식당에서 오후에 삼겹살 구워 먹었는데, 이건 모르신다) 그리고, 우리 마을에 최고령이신 아지매한테 고기를 조금 갖다 드렸어요. 마을 분들 모두에게 나누려니, 당신들이 회관에 안 나오신 거지, 그걸 일일이 갖다 드리지는 못하겠더라고요.

방앗간에서 전기 쓰니까 좀 낫지 않나요?


*그건, 이번 여름에 잘 지냈다. 하지만, 수도요금이 전보다 2배로 2만 원 나왔다.

여름에는 노인회에 돈이 별로 안 나온다. 11월부터 난방비가 나온다. 내가 총무로 여물게 사니까 1년에 2번 나들이도 한다. 나도 나이 팔심에 몇 년 하다가 물려줘야지. 참, 이번 마을 청소 부역하는데, 중성댁이 나보고 노인회 회장, 총무는 왜 안 나오냐고 하던데, 마을 청소는 동장이 알아서 할 일이지, 노인회 회장, 총무가 책임지는 일은 아니잖냐? 우리 집에서는 아들이 나가서 일하면 됐지. 동장 네가 이런 소리해서 나온 얘기 아니가?


-그런 소리를 저희가 왜 합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마을 일에 이견이 있으시면 회의에서 안건을 내시고요, 뭔가 석연치 않거나 궁금한 일이 있으시면 오늘처럼 직접 말씀해 주세요.


따님인지 손자들과 차에 내리는 모습을 보고 댁을 나왔다.

골목을 올라오면서, 부곡댁 대문 안을 들여다보니 부곡댁과 김남이 아지매 두 분이 마루에 앉아 계셔서, 들어갔다.


26. 부곡댁 김상조. 9.10, 집

80세, 친정은 기계 햇골, 감로사에 다닌다.

1남 4녀를 두었다.

23살에 이 집으로 시집왔다. 난리 때 불타고 집을 새로 지으셨다고 한다. 시집오니 시할매, 시부모, 동서, 시누부 등 대가족이었다. 층층시하에 사는 것이 힘들었다. 어른들한테 꾸지람 들을까 걱정하고, 바깥출입하는 걸 어른들이 싫어하셔서, 장 봤다 주면 정지에서 밥 해 먹는 일만 하고, 들에 가 밭매고만 했다. 아들 낳으면 봐줄 사람이 많아 신경도 많이 못썼다. 20년 전에 아저씨 돌아가셨다. 살면서, 재미있는 일은 없었다. 바깥나들이를 하고 친구들하고 어울려야 재미있는 일도 있지. 지금은 논, 밭 다 남주고 집 울타리 안에 밭만 일군다. (집안이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자손들한테 남길 말은 즈그까징 사이좋게 남매간에 대소 간에 우애 있게 살라. 참, 나들이를 안 하니 영정사진 찍는 것도 몰랐다. 언제 기회 있으면 알려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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