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서린 목욕

목욕 직후에 더 예뻐 보이는 이유

by 현재

한창 우울할 때에 나는 목욕을 자주 하였다.

머리 위로 물을 끼얹어, 수백억 개의 물방울이 머릿속에 든 잡념을 붙잡은 채 몸을 타고 떨어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며칠 간의 치열한 삶의 대가로 무기력함을 얻은 오늘이다. 난방이 먼저 돌아 가장 따뜻한 주방 바닥에 누워있던 나는 오랜만에 그때의 기분을 느껴보려 욕실 문을 연다.


따뜻함과 뜨거움 사이의 온도를 느끼기 위해 정성스레 수도꼭지를 돌리고는 샤워기를 머리에 가져다 댄다. 딱 알맞은 온도인가 했는데

이런, 차갑다. 아직 욕실이 덜 데워져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김이 자욱이 공간을 메울 만큼 뜨거운 물로 씻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물은 어는 점에 도달하기 직전이다.
아깝지만 닿기는 싫은 물을 따뜻해질 때까지 흘려보낸다. 그리고 다시 샤워기를 들어 머리에 가져댄다.

뜨거운 물이 두피 사이사이로 들어와 머리를 적신다. 머리, 목, 어깨를 차례차례 훑고 내려간 물줄기는 척추뼈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끝끝내 욕실 타일까지 당도한 그 물줄기는 조금은 튀어 오르고 다시 고인다. 고이다 고이다 얼마 안 가 바닥 전체로 퍼져나간다.

샤워기는, 이 작은 욕실에게는 너무 나도 큰 폭포이다.

자작자작 밟히는 물들은 일제히 하나의 구멍으로 휩쓸려간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잡념의 폭포가 이 욕실을 가득 채우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저 구멍 때문이겠지. 폭포 밑 연못의 수위가 일정하듯이 샤워기 밑 욕실 바닥의 수위도 일정하다. 하수구라는 무언가 더러운 어감을 가진 저 구멍 덕분에 나는 그때도 지금도 익사하지 않았다.

나는 흘러내려가는 물을 수도꼭지를 잠그는 것도 잊은 채 한동안 내려다본다.
온기에 취해 몽롱한 정신이 그 시간을 더욱 길게 만들었다.

'흘러 흘러가 돌아오지 말길. 재활용되어 내가 마실 물로 되돌아오지 말길'

짧은 감상을 남기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세면대 위 커다란 거울을 마주 본다.

거울 속의 나는 새하얗다.

요 며칠 치이고 굴러 더러워진 모습 따위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새하얠 뿐이다.

나는 조심스래 손을 뻗어 거울을 만진다. 손이 닿았던 자리만 김이 지워져 투명하게 빛을 낸다.

그 시절의 나는 물을 끼얹고 몸을 닦아 낸 뒤 거울에 비치는 새하얀 나의 모습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치이고 굴러 더러워진 모습 따위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 그저 새하얠 뿐인 모습이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모습이 아니었다.
직전까지 뿌려댄 샤워기의 데일만큼 뜨거운 물이 만들어낸 김일 뿐인 것이었다. 김이 서리지 않은 거울은 나를 그대로 드러내므로, 그리고 난 그대로의 나를 볼 자신이 없었으므로 그때의 나는 목욕을 끝내고 나서야 제대로 거울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하얗구나. 하얘. 겨울날 흩날리는 눈처럼 하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역시 씻길 잘했어라고 몇 번이고 중얼거렸었다.

그때의 내가 우울할 때마다 목욕을 했던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비단 잡념을 없애기 위함은 아니었다 싶다. 씻겨나가는 잡념, 따뜻함에 몽롱해진 정신, 새하얀 김서린 거울. 이 셋을 위하여 나는 몇 번이고 뜨거운 물을 머리 위에 쏟아부었었다.

다시 거울을 쳐다본다.

하얗다. 아니, 뿌옇다.
내 제대로 된 이목구비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뿌연 거울이다. 겨울날 흩날리는 눈보라만큼 뿌연 거울을 통해 나는 무엇을 보고자 했던 걸까?

거울에 손바닥을 완전히 대고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손을 움직인다.

손이 움짐인 길을 따라 김은 사라져 갔다.

손을 떼어냈을 때, 거울은 비로소 답답하고 뿌연 김을 벗고 온전히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투명한 표면은 온전한 나를 비춘다.

거울 속의 나는 피부 군데군데가 햇빛에 타 얼룩져있다. 평소에는 보이지도 않던 솜털은 더 잘 보였으며 목욕 한 번만으로는 사라지지 않는 잡티도 제 존재감을 여실히 뽐내고 있다.

김이 서렸을 때만큼 하얗지 않다.

그렇지만..

'되었다.'

욕실에 남은 김이 다시 거울을 뿌옇게 만들지 않도록 욕실문을 열어젖힌다.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몸 표면에 남아있던 물방울을 날려 체온을 떨어뜨린다. 남아있던 몽롱함이 순식간에 가신다.

..춥다.

다음에는 물기부터 제대로 닦고 문을 열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