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섬 산책기
나에게는 오래된 로망이 있다. 한적한 한강에서 자연을 맘껏 만끽하는 일. 돗자리에 누워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일. 사람들로 가득한 한강을 수차례 겪으며 마음 한구석에 품게 된 로망이었다. 언젠가 꼭 이루고 싶다고 바랐지만, 어느새 잊고 있던 그 바람을 오늘 이뤘다.
연속 4일의 연휴가 끝난 평범한 수요일이었다. 여전히 새벽에 잠드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고, 해가 길어지는 계절이 다가왔다. 요즘은 해가 뜨는 걸 느끼며 다섯 시 즈음 잠들곤 했는데,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알람을 맞춰 놓아서 11시쯤 눈을 떴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얕은 잠을 반복하며 이불속을 맴돌았다. 그러다 3시 가까이 되어 일어나 씻고 밥을 먹고, 창밖을 본 게 4시쯤이었다.
창밖 나무와 하늘이 너무 푸르러서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그 풍경을 보는 순간, 오늘 뭔가를 하지 않아도, 반드시 이 좋은 날씨를 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밖으로 나갔다.
막상 나가보니 갈 곳이 없었다. 늘 가던 스터디카페 아니면 스타벅스. 둘 다 도보로 가능한 거리였지만, 실내로 들어가는 순간 이 좋은 날씨는 잠깐 걷는 시간으로만 끝난다는 생각이 들어 억울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집 근처에서 멈춰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노들섬이 떠올랐다. 바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우리 집에서 버스 한 번이면 노들섬에 갈 수 있다. 평일이니까 사람도 적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갔던 노들섬은 초겨울 저녁이었다. 사람이 거의 없고 가끔 산책하는 이들만 오가던 고요한 저녁. 그때 나도 야경을 보며 걸었었다.
노들섬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파란 하늘과 초록빛 나무들이 보였다. 이 정도면 오늘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파란 하늘이었다. 야외공연장을 지나 노들섬에 갔다. 평일이라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한 건 오산이었다. 나처럼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미 머물다 나가는 사람도 많았다. 잔디 위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있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아니 줄지어 있었고, 흔들의자와 테라스 의자는 이미 만석이었다. 5시가 넘은 시간이라 퇴근하고 온 걸까? 아님 나처럼 시간이 많은 사람들일까? 학생들일까? 여러 생각을 하며 걷기 시작했다.
한강의 윤슬은 말도 안 되게 아름다웠고 흐드러지게 늘어진 나무들과 그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내 눈에 그야말로 완벽했다. 완벽하게 평온한 모습이었다. 나처럼 혼자 온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내가 집에서 누워만 있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자연을 누리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걷다 보니 긴 벤치 끝에 빈자리가 보여, 한쪽 끝에 앉아 있던 분들과 합석했다. 잠시 책을 읽었다. 맞은편에서 부서지는 윤슬이 눈부셔 고개를 들기 어려울 정도였다. 조금 뒤엔 내 옆에 또 다른 분이 앉아 그분도 책을 읽었다. 그 장면이 너무나 평화로웠다.
내 앞쪽 돗자리에서는 누군가 치킨 먹방을 핸드폰으로 찍고 있었는데, 그 화면 속에 내가 나오는 걸 알게 되었다. 불편해서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고 나서 노들섬을 한 바퀴 돌았다. 걷다 보니 반짝이던 초록빛은 없어지고 그늘이 나타났다. 파란 강물과 다리가 나타났고 언덕 위에서는 댄서들이 촬영 중이었다. 계속 걷다 보니, 앉을 수 있는 벤치들 마다 이미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걷다가 빈자리가 나타나, 또 다른 책을 읽는 분과 합석해 잠시 책을 읽기도 했다. 내가 걷던 뒤쪽 길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가끔 산책하는 사람들, 혼자 걷는 사람들만 있었다. 큰 나무와 벤치가 줄지어 있는 구간에는 커플들이 모두 자리하고 있었다. 어딜 가든 명당에는 사람들이 먼저 알고 찾아와 있었다.
한 바퀴를 다 돌고 나니 아까까지 파랗던 강물이 어느새 어두워졌다. 야외무대를 지나 올라가는 길목에서 사람들이 모두 한 방향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방향에는 붉게 물든 노을이 펼쳐져 있었다. 나도 그 순간을 담았다.
그리고 나의 두 번째 로망. 노들서가에서 시간 보내기. 예전에 왔을 때는 빈자리 없이 사람들이 가득했는데, 평일이라 그런지 매우 한적했다. 한 곳에 자리를 잡고 내 할 일을 하며 조용히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한번, 이 공간이 참 좋다고 느꼈다. 오늘의 하늘, 빛, 나무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 같다. 이런 하루는 종종 필요하다.
실재/ 2025.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