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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DAY35_미국에서 가장 좁은 트레일을 걸었다.

세계일주 시작, 45일간의 미국 로드 트립

by 현존

241204


유타의 대자연을 여행하며 유명한 엔텔롭 캐년을 가볼까 고민했지만, 상업적인 분위기와 입장료, 인파 속에서 사진만 찍고 나오는 경험은 우리가 원하는 여행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만의 엔텔롭 캐년을 찾기로 했다. 그렇게 우연히 알게 된 곳, Lower Dry Fork Trailhead. 이름도 낯설고, 정보도 많지 않았지만 그만큼 더 기대되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입구에는 각종 주의사항이 적혀 있었다. “물 꼭 챙기기”, “폭우 시 절대 진입 금지”, “표지판 없음”, “GPS 불안정”, “자기 책임 하에 트레킹” 같은 문구들이 경고하듯 서 있었지만, 동시에 이곳이 아직 덜 알려진 자유로운 땅이라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실제로 주차장은 아주 작았고, 간이 화장실 하나가 전부였다. 이 화장실이 이 트레일에서 마지막이자 유일한 화장실이므로 꼭 참고하길 바란다.


우리는 ‘물 꼭 챙기라’는 문구를 가볍게 여겼다. 잠깐 걷다 돌아오겠지, 했지만 트레일은 생각보다 훨씬 건조하고 길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모했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는 꼭 물을 챙겨가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정말 꼭이다.


트레일 초반은 넓은 평야였다. 걷기 쉬운 지형이라 한동안은 평화롭게 걸었다. 하지만 곧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울타리도, 표지판도 없었다. 울타리가 없는 건 많이 봤지만, 표지판조차 없는 트레일은 처음이었다. 처음엔 ‘그만큼 길이 잘 닦여 있겠지’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앞이 툭 트인 대지 그 자체. 방향 감각이 없다면 쉽게 길을 잃을 수 있는 구조였다.


다행히도 우리보다 먼저 이곳을 걸었던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돌탑들이 길을 안내해주었다. 그 조그마한 돌탑 하나하나가 이렇게 소중할 수 있다니. 자연 안에서의 배려란 이런 것임을 새삼 느꼈다.

조금씩 지형이 달라졌다. 가파른 절벽을 조심히 내려가고, 바람에 휘어진 기이한 나무들을 지나 걷다 보니 드디어 도착했다. Dry Fork Narrows.


‘얼마나 좁다는 걸까?’ 궁금했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정말 양옆의 협곡 사이로 끝도 없이 이어진 트레일이 펼쳐졌다.

놀랍게도 이곳은 과거에 바다였다고 한다. 그 말대로 벽면에는 마치 조개껍데기처럼 생긴 동그란 돌 알맹이들이 여기저기 박혀 있었다. 거센 물살이 빚어낸 흔적들. 믿기 힘들 만큼 섬세했다.
그런 바다가, 지금은 이토록 건조한 사막이 되어 있었다. 자연의 시간은 사람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리듬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점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길은 더욱 좁아졌다. 두 명이 나란히 걷기 어려울 정도.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던 하늘은 정말이지,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협곡 사이로 파란 하늘이 선명하게 잘려 들어오는 모습.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고 평화로운 공간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우리는 이 트레일의 하이라이트라 불리는 Peek-A-Boo Slot Canyon을 향했다. 그런데 입구에 다다랐을 때, 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여길 걸으라고?”
입구는 기괴하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그리고 그 기괴한 입구를 지나 올라가는 길은 거의 암벽등반 수준. 몸을 사용해 온몸으로 올라가야 했다.


백짝꿍은 이리저리 먼저 가보더니, 꼭 같이 가야 한다며 손짓했다. 나는 이미 지쳐 있었지만 그의 표정이 너무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문제는 올라가는 길. 높이가 너무 높아 나는 망설였고, 그는 자신의 어깨와 허벅지를 밟고 올라가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밟는다는 게 너무 미안했지만, 그렇지 않으면 오를 수 없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의 다리를 딛고 올라섰다.


Peek-A-Boo 협곡은 정말이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물살을 따라 흐르듯 휘어진 협곡 사이를 걷다 보면, 이게 정말 자연이 만든 건가 싶다. 오히려 인공적으로 이렇게 만들긴 더 어려울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걸었다. 숨이 차고, 덥고, 힘들어서 경치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그러던 중, 몇 시간 동안 아무도 없던 이 공간에서 처음으로 사람의 소리가 들려왔다. 한 가족이 다가오고 있었고, 그중 한 꼬마 여자아이가 협곡을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This is my happy place!!!”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토록 힘들고 버거운 공간이 누군가에겐 가장 행복한 장소가 될 수도 있구나.
나도 이 공간을 즐겨야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그렇게 다시 주변을 바라보니, 협곡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여정을 함께하는 짝꿍도 웃고 있었다.


이 협곡은 실제로 ‘미국에서 가장 좁은 트레일’ 중 하나로 손꼽힌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우리가 이 좁디좁은 길을 용케도 찾아와, 걸어냈다는 사실이 참 대견하게 느껴졌다. 이토록 멋진 자연 속을 걸을 수 있었다는 것이 그저 감사했다.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분명히 왔던 길인데, 표지판이 없다 보니 꽤 헤맸다. 이곳에 일부러 표지판을 설치하지 않는 건 자연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미국 국립공원을 다니다 보면 자주 보이는 문구,

“Leave No Trace (왔다간 흔적을 남기지 마라)”
를 여기에선 더욱 철저히 지키는 듯했다. 이곳엔 쓰레기통도, 길 안내도 없었다. 오롯이 자연, 그리고 나.


우리처럼 평범하지 않은 여행지를 찾는 사람이라면, 이곳을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관광지에서 느끼지 못한 자유를, 협곡 사이를 걷는 발끝에서 분명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조용하고, 거칠고, 때론 고된 여정이지만, 그 끝엔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백김밥로드 유튜브 영상 보러가기: https://youtu.be/kgn7cHpy8p8?si=B-9RjzLCd0tmtLq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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