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주 시작, 45일간의 미국 로드 트립
어젯밤, 브라이스 캐년 국립공원 근처 주차장에서 차박을 했다. 하늘엔 별이 총총 떠 있었고, 새벽의 기온은 점점 더 내려가고 있었다. 브라이스 캐년에서의 일출을 보기 위해 우리는 아직 어두운 새벽, 뷰포인트로 향했다.
12월 초의 브라이스 캐년은 이미 한겨울이었다. 영하의 찬 공기와 하얗게 쌓인 눈, 코끝을 얼게 하는 바람 속에서 몸을 웅크리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 차가움이 마음을 더 또렷하게 깨워주는 기분이었다.
브라이스 캐년은 유타주의 남서쪽에 위치한 국립공원이다. 낮에도 물론 아름답지만, 밤하늘의 별 관측지로도 유명하다. 미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다크 스카이 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어, 맑은 날 밤에는 은하수와 수천 개의 별들을 맨눈으로 볼 수 있는 장소라고 한다.
몇 년전에 백짝꿍은 브라이스 캐년에 다녀온 적이 있었고, 그 뒤로도 여러 번 “진짜 멋진 곳이야”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이번 여행 중 브라이스 캐년은 나에게도 유독 기대되는 장소 중 하나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브라이스 캐년은 사실 ‘캐년’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캐년은 강이나 침식 작용에 의해 깊이 패인 협곡을 말하는데, 브라이스는 그런 의미의 협곡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자연 원형극장(amphitheater)에 가깝다. 수천, 수만 년에 걸쳐 풍화와 침식으로 생성된 붉은 기둥들, 즉 ‘후두(hoodoos)’가 마치 조각 작품처럼 공원을 가득 메우고 있다.
해가 떠오르는 순간, 모든 설명이 멈췄다. 붉은 후두들이 하나둘씩 태양빛을 받아 불그스름한 색으로 빛나기 시작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CG로도 재현하기 힘든 자연의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동안 방문했던 국립공원들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풍경이었다. 바위산이나 숲과는 또 다른 독특한 풍경. 붉고 섬세한 기둥들 사이로 아침 햇살이 퍼질 때, 문득 ‘이토록 멋진 국립공원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미국 땅이 부러워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차를 몰아 도착한 곳은 내추럴 브리지(Natural Bridge)였다. 이곳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거대한 바위 다리가 있는 곳이다. 바위 속 연약한 부분이 바람과 물에 의해 서서히 침식되며 단단한 부분만 남아, 지금의 아치 형태가 된 것이다.
그 정교한 곡선을 눈앞에서 마주하자 절로 감탄이 나왔다. 누가 깎은 것도 아닌데 이토록 대칭적이고 조형적인 곡선이라니. 더 놀라운 건, 그 둥근 아치 구멍 사이로 보이는 침엽수 숲의 풍경이었다. 마치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문처럼 신비롭고 고요한 모습이었다.
브라이스 캐년을 뒤로하고 자이언 캐년을 향해 가는 길, Red Rock Canyon을 지났다. 이름처럼 붉은 바위와 땅이 이어져 있는 길이었는데, 그 붉음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채도가 빠진 듯한 초록빛의 넓은 초원이 나타났다. 눈이 환기되는 느낌이 들었다.
백짝꿍이 예전에 브라이스 캐년을 다녀왔을 때의 이야기를 유튜브 영상에서 꺼내는 장면이 있다. 같은 장소라도, 그날의 날씨, 해의 위치, 바람의 방향에 따라 완전히 다른 풍경이 된다. 오늘 본 브라이스 캐년은 1년 전 그가 본 장면과는 분명 다르다. 심지어 10분 전과 지금도, 똑같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찰나의 빛과 공기, 그 안에서 감정이 물들어가는 그 순간을. 언젠가 다시 여기 오더라도 오늘의 이 감동은 다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지금을, 더 사랑하게 된다.
이런 철학적인 생각에 잠기다 보니, 슬슬 배가 고파왔다. 자이언 캐년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도시 카납(Kanab)에서 점심을 해먹기로 했다. 근사한 야외 장소를 찾아 지난번 미역국을 끓여먹고 남은 미역을 활용해 멸치 칼국수를 만들었다.
국물이 끓는 소리, MSG멸치향, 그리고 그 위에 살짝 풀린 미역. 정말 맑고 개운한 국물 맛에 몸도 마음도 따뜻해졌다. 함께 곁들인 건 텍사스 독일마을에서 산 피클. 백짝꿍은 피클 한 입 먹을 때마다 감탄사를 연발했고, 그런 모습을 보니 나까지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다음 목적지는 자이언 캐년이다.
백김밥로드 유튜브 영상 보러가기: https://youtu.be/bcI9yJSwncA?si=cl4egGerf5oJpGI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