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애호가들의 로망? 트라피스트 인증 맥주를 마시다.

60km를 달려 벨기에에서 만난 수도원 인증 맥주

by 현존

자전거로 유럽일주 12일차, 누적 주행거리 약 390km.


오늘은 네덜란드 Herkenbosch에서 벨기에 Genk까지 약 60km를 달리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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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 출발

오늘 날씨는 최상. 그리고 우리의 컨디션도 최상. 이런 날은 달리라고 있는 날이다.

네덜란드는 독일보다도 자전거 도로가 더 잘 깔려 있고 대부분 평지라 달릴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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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위 자전거 인프라 국가”라는 말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길도 좋고, 중간중간 자전거 전용 맵도 잘 되어 있다.


풍차의 나라답게 바람은 거셌지만 우리는 그 바람을 가르며 쭉쭉 나아갔다. 어제 지나왔던 길을 다시 되짚으며, 초원 위의 자유로운 소들을 또 만나고, 그렇게 벨기에를 향해 페달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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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는 하늘이 유난히 푸르다. 흰 구름은 크고, 초록빛 자연은 선명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은 많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거대한 들판과 초원이 펼쳐진 나라에서 사람들은 무엇으로 살아갈까 하는 순수한 궁금증이 들었다.


네덜란드는 세계적인 농업 강국이다. 국토는 작지만 스마트팜 기술과 온실 농업이 발달해 농산물 수출 규모가 세계 상위권이다. 낙농업도 유명하고, 로테르담 항구를 중심으로 한 무역·물류 산업도 강하다. 겉으로는 평화로운 초원 같지만, 그 안에는 치밀하게 설계된 경제 구조가 숨어 있다. 조용하지만 강한 나라. 달리며 그걸 느꼈다.


강변을 따라 내리막길을 달리던 중, 백짝꿍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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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고, 오르막이 있으면 또 내리막이 있지.”

자전거를 타다 보면 인생의 축소판을 보는 기분이 든다. 힘들다가도 또 시원해지고,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그래서 자전거 여행이 좋다.


구글맵에 벨기에 국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이 다리만 건너면 다른 나라라니. 유럽연합 국가들은 정말 달리다 보면 아무 생각 없이 나라가 바뀐다. 경계가 없는 느낌이 이렇게 신기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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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as 강을 기준으로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나뉜다. 다리 하나를 건너자 우리는 벨기에 땅을 밟고 있었다.


오후 1시, 출발 후 2시간 만에 벨기에 입성.

카페는 가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맥주의 왕국 벨기에니까, 맥주부터다.

국경을 넘자 벨기에 국기가 크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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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찾아둔 펍을 향해 달리는데, 거대한 교회에서 오후 1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마치 “어서 와” 하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벨기에는 맥주의 왕국이라 불릴 만큼 종류가 많고, 품질도 높다고 한다.

우리가 들른 펍에서 가장 대중적인 벨기에 맥주 두 잔을 시켰다. Cristal Alken과 Grimbergen Double-Amb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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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stal Alken은 벨기에 라거의 대표주자다. 맑고 깔끔하며 가볍게 마시기 좋다. 청량감이 좋고, 부담 없이 계속 들어간다.

반면 Grimbergen Double-Ambree는 훨씬 묵직하다. 붉은빛이 감도는 앰버 컬러에 캐러멜 향, 약간의 토피 같은 단맛이 있고 뒤에는 은은한 쌉싸름함이 남는다.


오후 2시 종소리를 들으며 맥주를 마시고 우리는 숙소로 향했다.

그러다 영상 촬영을 멈출 수 없는 숲길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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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은 뜨겁지만 수풀에 가려 공기는 따스하면서도 서늘했다. 이런 길이 10km 이상 이어진다니, 벨기에도 자전거 탈 맛이 난다!


거대한 유채꽃밭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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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 아래 촘촘한 노란 꽃들. 잠시 멈춰 프링글스와 캐슈넛으로 에너지를 보충했다.


자전거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은 눈웃음 인사다. 마주 오는 사람에게 먼저 웃어주면 돌아오는 미소. 그 짧은 교감이 이상하게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오후 4시, 출발 5시간 만에 Genk 숙소 도착.

예약한 에어비엔비는 믿기 힘들 정도의 대저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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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화한 미소의 호스트 아주머니는 “여기까지 자전거 타고 오느라 고생했지?”라며 블랙커피와 벨기에 와플을 내어주셨다. 집이 좋은 에어비엔비는 많이 가봤지만, 이렇게 따뜻하게 맞아주는 호스트는 처음이었다. 나중에 우리가 에어비엔비를 운영하게 된다면 꼭 이렇게 하자고 다짐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이렇게 큰 규모의 집인데 내부는 더 엄청났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공간이 주는 압도감에 잠시 말을 잃었다. 천장은 높고, 빛은 넉넉하게 들어왔고, 집 안 공기는 여유로웠다. 2층 우리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일반 가정집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웅장했고, 마치 큰 레스토랑이나 갤러리의 중앙 계단처럼 존재감이 뚜렷했다.


그리고 뒷마당. 마당이라 부르기엔 너무 넓은, 작은 정원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잘 정돈된 잔디와 테이블, 그리고 집 전체의 구조와 인테리어가 어우러져 정말 뮤지엄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연신 “집이 정말 예쁘다”, “뮤지엄 같다”고 감탄하며 호들갑을 떨었는데, 호스트 분은 웃으며 “여기선 다들 이렇게 살아…ㅎㅎ”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셨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충격이었다. 이 집이 특별한 게 아니라, 이 동네에서는 자연스러운 풍경이라니. 문화의 차이가 공간에서 이렇게 체감될 줄은 몰랐다.


이렇게 아름다운 뒷마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맥주를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우리는 마트로 향했다.

그런데 동네를 걸으며 또 한 번 놀랐다. 집 하나하나의 규모가 모두 비슷하게 크고, 여유로운 마당이 기본처럼 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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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있을 때는 집과 집의 경계가 분명했고, 울타리와 보안 장치가 확실했는데, 이곳은 울타리조차 거의 없고 현관이 바로 보이는 구조였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분위기. 이 동네는 정말 안전한가 보다 싶었다. 공간의 개방감이 곧 그 사회의 신뢰도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대형 쇼핑몰에 도착해 마트로 들어가려던 순간, 쇼핑몰 안 펍의 생맥주 탭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안에 Leffe 생맥이 있었다. 백짝꿍이 벨기에에 오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벨기에에서 Leffe 생맥을 마셔보는 것이었는데, 우리가 지나온 펍들에서는 병맥만 있고 생맥은 없어서 아쉬워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발견하다니. 우리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레페 블론드, 레페 다크, 그리고 Stella Artois 생맥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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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ffe는 1240년 벨기에 레페 수도원에서 시작된 맥주다. 프랑스 혁명으로 수도원이 파괴되며 양조가 중단되었지만, 이후 브랜드가 복원되면서 수도원 전통을 계승한 ‘애비(Abbey) 맥주’로 이어지고 있다. 트라피스트처럼 실제 수도원에서 직접 양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역사와 레시피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레페 블론드는 약 6.6도의 벨기에 에일로, 금빛 색감에 꿀과 바닐라를 닮은 부드러운 단향, 은은한 과일 향이 어우러진다.


백짝꿍은 한 모금 마시더니 “내가 오렌지가 된 느낌”이라며, 달콤하면서도 속을 꽉 채워주는 맛이라고 표현했다. 정말로 체증이 싹 내려가는 듯한 표정이었다.


레페 다크는 블론드보다 색이 짙고, 조금 더 묵직하고, 뒤에 쌉싸름한 여운이 남았다.


스텔라 아르투아는 1366년 벨기에 루벤에서 시작된 전통적인 라거다. 맑고 영롱한 금빛, 깨끗한 몰트 베이스, 균형 잡힌 홉의 쌉쌀함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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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클래식. 나는 이 스텔라 생맥이 정말 맛있었고, 백짝꿍은 역시 레페가 더 좋다고 했다.


안주는 그린 올리브와 블랙 올리브. 살짝 쌉싸름한 맥주가 입안을 감돌 때 짭짤하고 감칠맛 있는 올리브를 함께 먹으면 정말 천상의 조합이다. 유럽은 올리브 종류도 다양하고 맛도 좋아서 이런 작은 안주 하나에도 행복해진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맛볼 특별한 맥주는 바로 벨기에의 트라피스트 인증 맥주였다.

트라피스트 맥주는 ‘Authentic Trappist Product’라는 공식 인증 마크가 있어야 하며, 실제 트라피스트 수도원 내부에서 수도사들의 감독 하에 생산되어야 한다. 또한 수익은 수도원 유지나 자선 활동에 사용되어야 한다. 단순히 수도원 스타일을 따르는 ‘애비 맥주’와는 다르다. 전 세계에서 이 인증을 받은 수도원은 단 11곳뿐이다.


마트에서 우리는 Rochefort 10, Chimay 150, Westmalle, 그리고 Duvel, Lindemans Kriek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나는 해물오일파스타와 샐러드, 윙을 준비했다. 백짝꿍은 내가 만든 파스타가 예전에 미국에서 10만원 주고 사먹었던 파스타와 맛이 비슷하다며 웃었다. 요리를 좋아하는 나는, 내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을 보면 정말 행복해진다.


먼저 Duvel(도수 8.5%)을 마셔보기로 했다.

1871년에 시작된 벨기에 브루어리에서 탄생한 이 맥주는 이름이 ‘악마’라는 뜻이다. 도수는 8.5도. 밝은 색감과 달리 알코올감이 강하고 홉의 쌉싸름함이 또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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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을 가득 따른 뒤 한 모금 마셨는데, 정말 정말 썼다. 소주를 섞은 것 같은 강렬함. 하지만 묘하게 매력 있는 맛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Chimay 150(도수 10%) 트라피스트 인증 맥주

1862년부터 이어진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만든 맥주로, 150주년을 기념해 출시된 제품이다. 깊은 구리빛 색감에 말린 과일과 캐러멜 향, 향신료 뉘앙스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다. 트라피스트 특유의 효모 향이 살아 있고, 바디감도 풍부하다.

(트라피스트 인증 맥주에 대한 더 자세한 리뷰는 영상으로 확인해주세요.)


밤이 되어 밖이 어두워지자 우리는 집 안으로 들어와 체리 맥주를 열었다.

Lindemans Kriek은 벨기에 전통 람빅 방식으로 자연 발효한 맥주에 체리를 넣어 숙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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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살 생각은 없었지만 벨기에에 오면 꼭 마셔보라는 말을 듣고 샀다.

그런데 생각보다 신맛이 강하지 않았고, 달콤한 체리 향이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더운 여름날 차갑게 마시면 정말 좋을 맛이었다.


마지막으로 Westmalle(도수 9.5%) 트라피스트 인증 맥주를 맛보았다. 맥주 도수들이 너무 높아서 취기가 돌아 Rochefort 10은 내일 마셔보기로 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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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년부터 양조를 시작한 이 수도원은 특히 ‘트리펠(밝은데 강하고, 화사한데 깊은 맥주)’ 스타일을 정립한 곳으로 유명하다.


수도원 맥주라고 하면 왜 수도원에서 맥주를 만들까 궁금해질 수 있다.

중세 유럽에서는 물이 오염된 경우가 많아 그대로 마시기 어려웠다. 맥주는 끓이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한 음료였다. 또한 수도원은 자급자족 공동체였고, 노동은 곧 기도의 일부였다. 빵과 맥주를 직접 만드는 것은 그들의 일상이자 생존 방식이었다.


맥주의 세계는 정말 무궁무진하다.

자전거로 국경을 넘고, 새로운 나라를 달리며, 우리는 맥주의 매력에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은 깊게 알수록 더 재미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달리고, 맛보고, 배우고. 그렇게 세상을 조금씩 더 알아가고 싶다.


백김밥로드 유튜브 영상 보러가기: https://youtu.be/AckwxlxGKDM?si=Syfn1zrK4q22MI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