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독일 맥주는 무엇인가요?"
오전 11시
길인지 아닌지 모를 리얼 산속 길을 달리고 있었다. 지도에는 분명 길이 있다고 나오는데, 눈앞에는 풀과 흙,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숲뿐이었다. 자전거 바퀴는 자꾸만 푹푹 빠졌고, 우리는 몇 번이나 자전거를 끌고 걸어야 했다.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고, 숨은 조금 가빴다.
솔직히 말하면, “이게 길이 맞아?” 하는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헤치고 나오자, 마치 장면 전환이라도 된 듯 갑자기 동화 같은 마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알록달록한 지붕, 벽마다 다른 색을 입은 집들, 단정하게 정리된 정원.
그렇게 우리는 독일 Dreieich를 지나치게 되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Dreieich는 프랑크푸르트 남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오래된 역사와 숲이 어우러진 동네였다. 이름은 ‘세 개의 참나무’에서 유래했다고 하고, 중세 성의 유적도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한다.
숲과 함께 살아온 시간이 길어서인지, 마을 전체가 차분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우리는 어느 하나도 같지 않은 집들을 보며 연신 감탄했다.
집 하나하나에 주인의 취향과 삶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숲속 자전거 길로 들어섰다.
초록초록한 나무들이 터널처럼 이어져 있었고, 햇살은 잎 사이로 부서져 길 위에 조각조각 내려앉았다.
바람은 잔잔했고, 숲은 고요했다.
맞은편에서 이 동네의 색감을 그대로 담은 듯한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노부부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 옆에는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 강아지는 우리를 보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옷이 참 잘 어울리시네요~ㅎㅎ"
자전거를 타며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종종 건네던 인사였다. 그저 웃으며 지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노부부께서 발걸음을 멈추셨다. 우리를 유심히 바라보시더니 다정하게 말을 건네셨다. 눈빛이 참 맑고 부드러웠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저희는 한국 사람이고, 지금 라트비아 리가에서 부터, 여기까지 자전거로 유럽일주를 하고 있어요. 저희의 최종 목적지는 이탈리아 밀라노 입니다ㅎㅎ"
그 말을 들은 두 분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나 되묻고, 우리의 여정을 진심으로 멋지다고 해주셨다.
낯선 나라에서, 낯선 숲속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받는 진심 어린 응원은 생각보다 큰 울림이 있었다.
그러다 독일 하면 맥주 아니겠는가. 백짝꿍의 눈이 반짝였다.
"할아버지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독일 맥주는 무엇인가요?"
정말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맥주? 우리집으로 올래?
우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게 지금 실제 상황인가? 여행을 하며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이렇게 아무런 조건 없이 집으로 초대받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두 분의 얼굴에서 단 한 톨의 의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따뜻함뿐이었다.
"네! 좋아요!"
우리는 웃으며 대답했고, 그렇게 다시 동화 같은 마을로 돌아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버터를 닮은 부드러운 색감의 2층 집 앞에 도착했다.
차고로 들어가자마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이게 내 맥주들이여~"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아래로 따라오라고 하시더니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은 정말 ‘비밀 창고’ 같았다. 더 많은 맥주와 와인들. 종류도 다양했다. (술을 정말 좋아하시는 건가? 아니면 판매를 하시는 건가?)
그중 할아버지는 Schlappe-seppel이라는 맥주를 꺼내셨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맥주라며 우리에게 두 병을 건네주셨다.
숲속에서 우연히 만난 인연이, 이렇게 지하 창고까지 이어질 줄이야. 현실인데도 자꾸 꿈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건 아닐까, 그런 기분.
우리가 다시 올라가려 하자 할아버지께서 또 말씀하셨다.
"너네 와인도 좀 줄까?"
백짝꿍은 정말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이었다.
"너무 좋죠!"
멋진 독수리 그림이 그려진 "Grauer Burgunder" 화이트 와인을 꺼내주시며 발음을 아주 멋진 목소리로 읽어주셨다.
"이게 피노누아 인가요?"
"피노 그리지오야"
그러시더니,
"피노 누아 와인도 줄까?"
우리는 분명 괜찮다고 했는데, 할아버지는 이미 또 다른 와인을 찾으러 가셨다ㅋㅋ
결국 "피노 그리지오 와인과 피노 누아 와인 한병씩 줄게~" 라며 두 병을 안겨주셨다.
백짝꿍은 정말 감사하다며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했다.
나 역시 가슴이 묵직해졌다. 처음 본 사람에게 이런 환대를 받는다는 게, 얼마나 큰 일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유리병이라 깨질 수 있다며 신문지로 정성스럽게 포장까지 해주셨다.
그 손길이 참 세심했다. 한 겹, 또 한 겹 감싸며 혹시 모를 흔들림까지 배려해주셨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또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벽마다 걸린 그림들, 얼룩말 가죽 카펫, 아프리카에서의 이야기. 삼촌이 그렸다는 그림과 자화상까지.
그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두 분의 삶이 전시된 작은 갤러리 같았다.
우리에게 명함을 건네주셔서 독일어로 적힌 직업을 여쭤봤더니 "변호사" 라고 하셨다.
노동법 및 건설 민사 분야라고.
"사람들을 도와주시는군요~?"
"음... 그렇지 그러길 바래 ㅎㅎ"
그 수줍은 웃음에서, 겸손과 자부심이 동시에 느껴졌다.
백짝꿍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도와주시는 거 맞아요, 저희를 이렇게 환대해주셨잖아요~ 저희는 정말 행복해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우리의 행복을 빌어주시며, 남한과 북한이 언젠가 좋은 관계가 되길 바란다고, 과거에 서독과 동독이 통일을 했던 것처럼.. 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은 단순한 덕담이 아니었다. 자신의 역사에서 길어 올린 진심 어린 바람이었다.
백짝꿍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희는 당신에게서 큰 사랑을 느꼈어요, 어떻게 이런 마음을 저희에게 나눠주실 수 있는건가요..?"
한참을 고민하시던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음.."
"나는 너희가 세상을 경험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탐험하려는 마음이 느껴졌어. 그래서 그 모습이 참 사랑스러웠어."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려는 너의 삶의 태도, 네가 말했던 것 처럼 판단하지 않고 세상과 사람들을 보려는 마음. 그러면 더 많이 볼 수 있고, 더 많이 들을 수 있고, 더 깊이 느낄 수 있지.."
"그 태도는 정말 좋은 거야. 계속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고, 그 마음을 가족에게도 나눠보면 좋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눈물이 고였다.
요즘 삶이 늘 순탄하지만은 않다는 걸 느끼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물론, 삶 속에서 실망하고, 속고,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그렇지만 이런 경험들은 그저 다음을 위한 단계일 뿐이야..” 라는 그의 말이, 마치 지금의 나를 정확히 짚어주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순간을 기억하고자 함께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우리는 짧은 감사의 편지를 적어드렸다.
그리고 할머니 로지, 할아버지 갓스힐, 강아지 우피.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뒷마당에서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겼다.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건 그 한 장의 사진뿐이었지만, 그 안에는 우리의 진심을 담았다.
이제 떠나야 하는데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여러 번 감사하다고 말하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두 분은 손을 흔들어주셨다.
우리는 숲속 공원에 앉아 할아버지가 주신 맥주를 열었다.
"나는 처음 본 사람한테서 이렇게 진짜 따스한 사랑으로 가슴이 뭉클한 건 내 인생 처음인 것 같아"
"그리고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어. 내가 마음이, 우리가 마음이 그만큼 열리니까 이런 사람들을 마주치나..?"
"진짜 우리가 못된 생각을 하고 못된 행동들만 하면 이런 일이 없을 것 같아"
정말, 이런 일도 있구나. 여행을 하면.
내가 좋아하는 작가 류시화의 글이 떠올랐다.
화도 전염되고, 사랑도 전염된다는 이야기.
우리는 오늘 사랑을 나눔 받았다. 이제 우리가 나눌 차례였다.
마지막에 할머니, 할아버지와 인사를 나눌때 백짝꿍이 말했다.
"당신이 나를 이렇게 환대해준 만큼 나도 이제 낯선 사람들에게 환대를 분명히 해주겠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미소 지으며,
"일단 너의 와이프와 자녀한테 해라"
그 말에 모두가 웃었다. 사랑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거라는 걸 다시 배웠다.
오후 12시 40분, 우리는 독일 벤스하임을 향해 다시 달렸다.
중간에 멈춰서 들린 카페에서 마신 라떼는 자전거 여행 중 가장 맛있었고, 고운 모래밭에 또 한 번 넘어졌지만 씩씩하게 일어났다.
오후 4시 40분, 벤스하임 숙소에 도착했다.
온몸은 땀 범벅이었지만 마음은 유난히 맑았다.
일요일이라 마트가 문을 닫아 가방에 남은 재료 올리브유, 양송이, 마늘로 알 수 없는 볶음밥을 만들고, 할아버지가 주신 와인을 따랐다.
산뜻한 화이트 와인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데, 단순히 맛있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 안에 담긴 마음이 함께 넘어오는 느낌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한참을 이야기하다 잠들었다. 오늘은 정말 꿈같은 날이었다.
백김밥로드 유튜브 영상 보러가기: https://youtu.be/ECw10PLlR-A?si=6kMMo2D_iezCyP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