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달려보니 알게된 유로벨로 15의 진실
오전 9시, 독일 Oftersheim 에어비엔비 숙소
오늘은 약 50km를 달려 독일의 Karlsruhe까지 가야 하는 날.
아침으로 나는 닭가슴살을 넣고 칼칼한 죽을 끓였다.(음식 사진만 봤을땐 이게 뭐야 싶겠지만.. 꽤 맛있었다.)
그런데,,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커튼을 걷어보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필 오늘, 50km를 달려야 하는 날에. 속으로 ‘어쩌지’라는 말이 자동 재생되었다.
나는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백짝꿍은 카메라를 들고 재밌겠다며 농담을 던지고 있었다ㅋㅋ
하지만 비가 와도 우리는 달려야 한다. 이미 숙소는 예약되어 있고, 오늘 안에 도착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것들로 최대한 비에 대비해 짐을 쌌다.
오스프리 배낭에 튼튼한 쓰레기봉투를 씌웠고, 작은 배낭은 쓰레기봉투와 한국 다이소에서 사온 방수커버를 씌웠다.
처음엔 엉성해 보였지만, 막상 해보니 꽤 그럴듯했다. 가진 게 많지 않아도 머리를 쓰면 길은 생긴다.
그리고 자전거 여행 중 독일의 큰 도시에서 우리나라 다이소 같은 곳에서 샀던 5유로짜리 판초를 드디어 꺼내 입었다.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싶어 샀던 건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퀄리티가 생각보다 좋아서, 5유로라는 가격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문제는 휴대폰이었다.
계속 지도를 보며 달려야 하니 자전거 거치대에 올려둬야 하는데, 비를 어떻게 막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위생장갑이 번뜩 떠올랐다. 위생장갑 안에 내 작은 아이폰이 딱 들어갔다.
밀봉 완료. 이렇게 우리는 나름 완벽한(?) 비상 대비를 마쳤다.
오전 10시 20분, 힘차게 출발했다.
비가 오니 처음에는 천천히 달렸다. 비를 맞으면서도 어떻게든 덜 젖으려고 애쓰면 더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마음을 바꿨다.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온전히 젖어보자.’
젖지 않으려 버티는 대신, 비를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자 묘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원래 비 오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비를 맞으며 달리는 기분을 조금씩 즐기게 되었다.
비를 머금은 자연이 내뿜는 특유의 공기, 귓전에 떨어지는 빗소리, 젖은 도로 위를 가르며 달리는 느낌.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또렷해진다. (물론 기분이 좋을 때만 그렇다. 솔직히 말하자면.)
달린 지 10분 만에 판초를 입은 부분을 제외하고는 다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그리고 곧 진흙밭이 등장했다. 백짝꿍은 “이 길보단 강변을 따라 가자. 그래도 길이 더 나을 거야.”라고 했다. 나는 구글맵을 따라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었다. 구글맵은 괜히 구글맵이 아니니까.
하지만 이 진흙밭을 몇십 킬로 달릴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결국 백짝꿍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 잘 깔린 아스팔트 길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그냥 적당히 달리고 숙소를 바꾸면 안 되나요?”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얼마나 달릴지, 어디에서 잘지 미리 계산해 숙소를 예약해둔다.
에어비엔비 규정상 하루 전에는 대부분 100% 환불이 어렵다. 그래서 플랜을 쉽게 바꿀 수 없다.
계획은 우리를 안전하게 하지만, 동시에 묶어두기도 한다. 이게 계획의 단점일까.
비는 점점 더 세졌다. 우리는 이미 다 젖었다. 그래서 그냥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자갈밭, 풀밭… ‘이게 길이 맞나?’ 싶은 길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을 할수록 더 고통스러운 건 나 자신이다. 이런 지뢰밭 같은 길도 달리다 보면 결국 좋은 길이 나온다. 인생처럼.
몸이 점점 차가워졌다.
7km만 더 가면 카페가 있다. 따뜻한 카페라떼와 빵을 떠올리며 힘을 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유로벨로 지도가 나타났다. 우리가 그토록 찾던 EuroVelo 15!
표지판에도 유로벨로 15 마크가 보이기 시작했다. 구글맵을 따르면 50km, 유로벨로 15를 따르면 70~80km.
백짝꿍은 말했다. “비 오니까 더 멀어도 안전한 유로벨로로 가자.”
주행거리가 늘어난다는 게 솔직히 괴로웠지만, 안전이 우선이다.
그렇게 우리는 유럽 자전거 일주 시작 2주 만에 드디어 유로벨로 15를 타게 되었다.
이제 구글맵 없이, 표지판만 보고 Karlsruhe를 향해 가기로 했다.
유로벨로 15는 강변만 따라가는 길일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달려보니 도시도 지나고, 집 옆도 지나고, 공장도 지난다.
여러 길을 통과하며 이어지는 하나의 루트였다.
그럼에도 길이 끊기지 않고 안전한 자전거 도로가 계속 이어진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초록 잔디와 나무 사이를 달리다 잠시 멈춰 귤을 까먹었다.
독일 과일은 왜 이렇게 맛있을까. 야생에서 따먹는 과일도 달고, 마트에서 산 과일도 새콤달콤하다.
다시 출발하자, 비 오는 날에도 우리처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보였다. 괜히 반갑고 힘이 났다.
함께는 정말 힘이 된다. 오늘 같은 날, 백짝꿍이 없었다면 나는 절대 못 달렸을 것이다.
비는 계속 쏟아졌고, 신발은 완전히 수족관이 되었다. 몸은 점점 추워졌다.
그때 백짝꿍이 외쳤다. “이것은 낭만인가 개고생인가?”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낭만이다! 이것은 낭만이다~!”라며 스스로 답했다.
낭만과 고생은 한 끗 차이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가 낭만을 외치자마자 비가 더 쏟아졌다. 하늘이 감동이라도 한 걸까...
우리는 드디어 큰 마트 안 카페에 도착했다.
빗물에 젖은 몸을 털고 들어가 커피 세 잔과 빵 세 개를 시켜 허겁지겁 먹었다.
3시부터는 비가 그친다고 해서 한 시간 정도 쉬기로 했다.
백짝꿍은 초콜릿이 먹고 싶다고 했고, 나는 젤리가 당겼다.
마트에 들어갔다가 ‘Duvaco’라는 두바이 초콜릿을 발견했다.
카다이프와 피스타치오 스프레드가 적당히 들어 있어 정말 맛있었다.
가격은 약 5천 원. 검색해보니 한국에서는 4만 원이 넘게 팔리고 있었다. 8배라니. 대란이긴 한가 보다.
카페에서 나오니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하늘은 맑아져 있었다.
젖은 신발과 옷이 햇살에 마르길 바라며 페달을 밟았다. 쌀쌀했던 몸이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유로벨로 15를 달리다 문득, 나는 백짝꿍이 자전거 타는 모습을 제대로 찍어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고, 나는 카메라에 그를 담았다.
자전거 타기는 인생과 닮았다.
비가 오면 해가 뜨고, 해가 뜨면 또 비가 온다. 날씨는 내가 통제할 수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힘든 일이 지나가면 행복이 오고, 행복하다 싶으면 또 시험이 온다.
그 파도를 타면 인생은 꽤 재미있다. 다만, 그 파도를 잘 타는 건 참 어렵다.
그래서 문득 생각했다. 인생이 조금 무료하거나, 진짜 도전적인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면 유럽 자전거 일주를 꼭 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미국 로드트립만큼이나, 아니 그만큼 깊게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여정이다.
그 말을 하자마자 윈도우 배경화면 같은 비현실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푸른 하늘, 초록 들판. 눈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오후 5시 30분, 출발 후 약 7시간 10분 만에 우리는 Karlsruhe에 도착했다.
카를스루에는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위치한 큰 도시다. 도시 중심의 궁전을 기준으로 방사형으로 길이 뻗어 있어 ‘부채 도시’라고도 불린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와 연방대법원이 있는 법의 도시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시안 마트에 들러 저녁과 다음 날 아침 재료를 샀다.
숙소는 따스한 느낌의 넓고 깔끔한 공간이었다. 오늘 하루의 고생을 포근히 안아주는 집.
쌀쌀했던 몸을 녹이기 위해 우리의 소울푸드 김칫국을 끓였다.(거기에 불닭까지 곁들여)
비를 맞으며 달렸던 하루의 끝은 뜨끈한 국물과 함께였다.
백김밥로드 유튜브 영상 보러가기: https://youtu.be/3xg1DzpF8mg?si=h4_M4gkB52dlORp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