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할머니가 주신 아주 귀한 선물

‘Quitten’이라고 적힌 수수께끼

by 현존

자전거로 유럽일주 17일차, 누적 주행거리 약 647km


오전 9시

어제 한가득 끓여두었던 김칫국을 다시 한 번 팔팔 끓였다. 국물이 더 진해진 느낌이었다.

따뜻한 김칫국에 밥 한 그릇. 타지에서 먹는 한식은 이상하게도 마음까지 단단하게 채워준다.

오늘은 더 잘 달릴 수 있겠다, 하는 든든함이 배 속에서부터 올라왔다.


오늘은 독일을 떠나 프랑스로 향하는 날이다. 목적지는 프랑스 Soufflenheim. 약 50km를 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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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fflenheim은 알자스 지방에서 전통 도자기로 유명한 마을이다. 마을 곳곳에 도자기 공방과 상점이 있고, 집 외벽과 창가에도 도자기 장식이 놓여 있어 동네 전체가 하나의 도자기 마을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시골 프랑스를 자전거로 들어간다니, 생각만으로도 설렜다.


오전 10시 20분

출발하자마자 아주 멋진 작은 터널을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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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찻길 옆을 따라 달리다 보니 바람이 부드럽게 등을 밀어주었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어느새 10km. 아직 몸이 완전히 풀리기 전인데도, 오늘은 유독 페달이 가볍게 느껴졌다.


잠시 멈춰 하리보 젤리로 에너지를 보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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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Haribo 의 고장이라 그런지, 젤리 종류도 정말 다양하다.

평소에는 젤리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 자전거를 타다 먹는 젤리는 왜 이렇게 맛있는지. 당이 온몸으로 퍼지는 느낌이었다.


자전거를 탄 지 어느덧 2주. 이제는 20km 정도는 쉬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엔 5km만 타도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는데..ㅎㅎ


그러다 아주 조그만 날파리떼가 가득한 구간을 지나게 되었다. 순식간에 옷과 얼굴 여기저기에 달라붙었다. 나는 안경을 써서 눈은 지켰지만, 백짝꿍은 선글라스를 끼지 않은 채 달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눈이 큰 사람인데, 눈 주변은 물론이고 눈 안으로까지 날파리들이 들어가 버렸다. 멈춰 서서 하나하나 떼어내느라 고생을 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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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백짝꿍은 짜증을 내기보다, “내가 이 친구들 영역을 침범했으니 카르마를 받은 거지 뭐.” 라고 말했다. 이 와중에도 철학을 얹는 사람이라니. 나는 웃음이 터졌다.


조금 더 달리다 해바라기 밭을 발견했다. 그런데 해바라기들이 전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해가 없어서 그런가, 싶었다. 그때 백짝꿍이 갑자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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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라! 뭘 잘못했길래 고개를 숙이는가! 잘못해도 괜찮으니 고개를 들라!”

나는 빵 터졌다. 알고 보니 해바라기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본인에게 하는 말이라고 했다.

“어깨를 피고, 허리도 쫙 펴고, 고개를 들라! 미소를 짓고!” 라고 외치며 해바라기 밭을 떠났다.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듣고 나니 나까지 괜히 자세를 바로잡게 되었다.


어느 작은 마을을 지나는데 자동차 시속 측정기가 있었다. 자전거 속도도 찍히려나? 궁금해졌다.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19km!’ 생각보다 괜찮은 숫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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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짝꿍은 뒤에 나온 17km만 보고 17km라고 우겼지만, 나는 그냥 웃어 넘겼다.

나중에 영상 편집을 하며 다시 확인해보니 19km가 맞았다.

그때 백짝꿍의 머쓱한 표정이 아직도 생각난다.


다시 해바라기 밭이 나타났는데, 이번엔 노란 얼굴을 활짝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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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짝꿍은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 고개 드니까 이쁘잖아~” 마치 진짜 친구에게 말하듯이.


길을 가다 과일이 유난히 먹고 싶어졌다.

마침 어떤 가정집 앞에서 예쁜 사과처럼 생긴 열매를 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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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할머니께서 마당에서 키운 나무 열매를 따서 1개에 1유로에 팔고 계신 것이었다.

사과인 줄 알고 여쭤봤더니 아니라고 열심히 설명해주셨다. 그런데 우리가 독일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마침 동네 주민 한 분이 오셔서 서툰 영어로 설명해주셨다. 생으로는 못 먹고, 설탕에 재워 잼으로 먹거나 술을 만든다고. 그 설명을 듣고 번뜩 떠올랐다. ‘아, 모과인가?’


할머니가 적어놓은 ‘Quitten’을 검색해보니 정말 모과였다. 그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

생으로는 못 먹는다 해도, 이렇게 정성으로 키운 열매를 설명해주신 마음이 고마워 기념으로 하나 사려고 1유로를 건넸다.

그런데 할머니는 손사레를 치며 그냥 하나 가져가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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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백짝꿍은 아이처럼 기뻐하며 할머니와 따뜻한 악수를 나누었다. 그 장면이 참 예뻤다.

“이따 숙소 가서 잘라 먹어보자!”
“숙성 시켜야 되는데..?”
“한 번 먹어보는 거지~ 너무 정석대로 살면 재미없잖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독일은 야생 과일이 참 많다.

야생 사과가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포도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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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먹은 자국 하나 없이 너무 건강해 보였다.

백짝꿍이 카메라를 켜고 이야기하던 순간, 나는 포도 한 알을 따서 맛보았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달았다. 마트 포도보다 더 달고 진했다.

이미 감탄 중인 나를 보고 백짝꿍은 깜짝 놀라더니, 자기도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맛있어 보이는 포도알 하나를 따서 건네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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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몇 알을 더 따먹고 출발했다.

독일 야생 과일은 맛없는 게 뭘까. 참 신기한 나라다ㅎㅎ


이제 라인강을 기준으로 국경이 바뀐다.

세계여행 하면서 Paris 에는 한 번 가봤지만, 자전거로 넘는 프랑스라니.

프랑스 시골이 참 예쁘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 더 기대가 됐다.

‘Frankreich(프랑스)’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라인강 위 다리를 건너 프랑스로 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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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 있지 않아 마음이 조금 졸였다.

하지만 조금 더 달리자 다시 자전거 길이 이어졌다.

프랑스에 왔다는 게 실감 난 건, 자전거에 바게트를 싣고 가는 분을 봤을 때였다. 그 장면 하나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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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들러 잠시 쉬었다.

바게트의 나라답게 바게트 피자가 있었다. 바삭한 식감이 정말 예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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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맛있어서 세 개나 먹고 다시 숙소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노란 단무지 같은 차가 자전거 도로를 막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중지 손가락을 까딱이는 모형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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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게 기분 나쁜데 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한참을 웃다가 다시 출발했다.

프랑스로 넘어오니 맑은 햇살이 우리를 비춰주었다.


오후 3시 30분, 출발 후 5시간 10분. 드디어 Soufflenheim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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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서 장을 봐 해산물 크림 파스타와 샐러드를 만들었다.

백짝꿍은 프랑스에 왔으니 와인을 마셔야 한다는 생각에 피노 그리스를 한 병 사왔다.

그런데 문제는 와인 따개가 없다는 것. 온갖 방법을 시도하다가 결국 코르크가 와인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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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히 찾아보니, 코르크는 천연 나무껍질로 만든 것이고 소량이 들어가도 건강에 해가 없다고 한다.

다만 맛에 약간의 영향이 있을 수 있다고.

우리는 “자연의 방식이네.” 라며 그냥 마시기로 했다.

넓직하고 편안한 에어비엔비 숙소에서, 맛있는 파스타와 와인을 마시니 여기가 바로 천국 같았다.



백김밥로드 유튜브 영상 보러가기: https://youtu.be/zV3FSnyUsCo?si=56zIUvtCVbdQbjl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