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세금이나 채무를 일정 부분 탕감해 주는 정책은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한 장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형평성의 균열이 숨어 있습니다. 세금을 성실히 내고 빚을 책임 있게 갚아 온 사람은 사회계약의 기본을 지킨 셈입니다. 하지만 체납자나 부실 채무자에게 반복적·광범위한 탕감을 허용하면 정직한 사람이 상대적 손해를 보는 구조가 생깁니다.
특히 이런 조치가 일상화되면 “어차피 언젠가 깎아줄 테니 지금은 책임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잘못된 신호가 퍼집니다. 결국 납세 윤리와 재정 규율이 동시에 약화되고,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좌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세금은 단순한 금전적 의무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가 부담을 나누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지켜 온 다수의 노력 위에서 탕감 제도가 운영되는 만큼, 정책이 설계되는 순간부터 형평성의 문제를 신중하게 따져야 합니다. 특정 집단만의 일회성 혜택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신뢰를 지켜야 한다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모럴 해저드와 정치적 유혹
탕감은 본질적으로 책임의 일부를 사회가 대신 짊어지는 행위입니다. 이번 정부의 특징이죠. 개인의 고민을 사회로 돌립니다. 공공임대가 그렇고, 탕감도 그렇습니다. 개인이 져야할 책임을 공동으로 돌리고 사회적 비용으로 감당하게 하는거죠. 큰 정부를 지향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부의 태도가 사람들을 점점 이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갑작스러운 재난이나 경기 침체처럼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이런 제도가 숨통을 틔워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탕감이 자주, 그리고 대규모로 시행될수록 모럴 해저드의 위험은 커집니다. 세금을 늦게 내거나 빚을 갚지 않아도 언젠가 구제받을 것이라는 학습 효과가 생기고, 재정 규율이 흐려집니다.
정치권의 유혹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국민 부담 완화”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탕감이 발표되면, 정책의 본래 취지가 경기 안정인지 표심 확보인지 모호해집니다. 성실한 납세자는 이 과정에서 박탈감을 느끼고, 제도에 대한 신뢰를 잃습니다. 재정 건전성과 사회적 신뢰가 훼손될 때, 그 비용은 결국 모든 시민이 나누어 지게 됩니다.
공정성을 지키는 제도 설계
탕감 정책을 무조건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기치 못한 재난이나 제도상 결함으로 인해 발생한 부담을 사회가 함께 해결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제도가 사회적 안전망으로 기능하려면 일회성과 예외성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대상과 기준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엄격한 심사와 사후 관리를 통해 남용을 막아야 합니다.
또한 성실한 납세자에 대한 보상 장치를 병행해야 합니다. 세액 공제, 납부 이력에 따른 가산점 등 긍정적인 유인을 마련하면 “책임을 다한 사람은 결코 손해 보지 않는다”는 신호를 줄 수 있습니다. 탕감은 공동체가 특정 상황에서 취약한 구성원을 돕는 응급 처방일 뿐, 정상적인 재정 질서를 대체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정성과 책임의 균형을 지키는 세심한 설계가 이루어질 때, 세금과 재정 시스템은 사회적 신뢰를 지키는 기반으로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탕감은 짧은 순간의 고통을 완화할 수 있지만, 그 설계가 허술하면 사회 전체의 세금 준수 문화와 책임 의식을 무너뜨릴 위험이 큽니다. “세금을 성실히 내면 바보가 된다”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도록, 정부는 탕감의 범위와 절차를 투명하게 관리하고 정직한 시민이 결코 손해 보지 않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공정한 사회가 지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