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일상에서 찾는 아동교육자로서의 의미
샌프란시스코의 10월은 조금 다르다. 보통 7-8월은 안개와 바람의 영향으로 으슬으슬 춥고, 9-11월 사이에는 날씨가 좋아지면서 일년 중 가장 더운 날이 찾아오기도 한다. 나가 놀기 좋고, 야외에서 파티하기 좋다. 그래서 그런가, 나에게는 생일이 모여있는 달이기도 하다. 친언니 생일, 남편의 동생 생일, 남편 사촌의 아이들의 생일.
작년 10월, 날씨가 한창 좋을 때 남편의 고종사촌 애니의 2살배기 아들, 맥스 생일파티에 초대받았다. 남편의 고모댁과 애니네는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살고, 명절이나 이벤트가 있으면 종종 하우스 파티를 열어 초대해 주시곤 한다. 지난 2-3년간은 코로나 때문에 왕래가 적어져서 맥스가 돐 때 한 번 보고 처음이었다. 2살짜리의 생일이라니, 선물을 골라야 한다! 오 프레셔가 밀려온다. 2살짜리는 내 전문분야가 아니던가!
남편과 타겟(미국의 홈플러스 같은 마트) 장난감 코너에 갔다. 한국이고 샌프란시스코고 간에 마트 장난감 코너는 당대 상업주의 물질주의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다. 색색깔 화려한 플라스틱의 향연. 괴물모형, 칼과 방패, 어린이 화장세트, 어른도 들어갈 만한 크기의 카라반과 조랑말 인형, 레고세트, 버튼이 24개 쯤 있는 유아용 장난감... 온갖 영화, 만화 캐릭터와 소품들이 넘쳐나 눈을 물론 뇌까지 어지럽게 했다. 영유아 교육현장의 따뜻한 뉴트럴 톤, 목재 및 자연소재에 익숙한 나로서는 실로 놀라운, 아이들의 시야에서 본다면 이 곳은 얼마나 sensory overload 스러운 곳인가.
하지만 제 버릇 못 준다고, 냉철한 눈으로 찾다보면 때로는 '오오 이런제품이' 스러운, '이거라면 좀 형형색색 이어도 발달적으로 적합하고 흥미롭다' 하는 것들을 찾을 수 있다. 마침 타겟의 실제 쇼핑카드와 똑같이 생긴, 미니어쳐 쇼핑카트 장난감이 눈에 띄어 끌리던 차에, 남편이 뭔가를 들고 왔다. 앙증맞은 사이즈의 보라색 다이슨 청소기 상자. 상자 그림은 어린이 신장에 맞는 크기에 집에 있는 실제 다이슨이랑 똑같이 생겼더랬다. 집에 돌아가 아마존에서 검색했다. 보아하니 어떤 장난감 회사에서 상품을 출시하고, 다이슨과 협약을 맺어 이름을 다이슨이라고 당당히 붙여 절찬리 판매중인 듯 했다. 배터리를 넣으면 무려 실제로 약간의 먼지 흡입 능력도 있는. 그래, 이거다! 만 2세에는 신체 대근육 발달로 스스로 움직이며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진다. 자연히 어린이는 자신이 조작하고 대근육을 실험해 볼 수 있는, 끌거나 밀거나 하며 반응을 바로 관찰할 수 있는 놀이에 흥미를 많이 보인다. 게다가 일상에서 엄마나 아빠가 항상 사용하는, 실제로는 너무 커서 도전할 수 없지만 역할놀이로 경험을 재구성하고 도전해 볼 수 있는 청소기라니. 나는 노란색으로 주문했다.
생일파티 날. 꽤나 많은 일가친척들과 친구들이 모였다. 당연히, 뒷마당 한 구석 테이블에 맥스의 생일 선물도 잔뜩 쌓였다. 맥스 엄마 애니는 작년에 선물해 주었던 벌모양 붕붕카를 너무 좋아한다며, 아직도 방에서 질주한다고 (주택에 살아서 층간소음 문제 없음) 작년 최고의 선물이었다며 치켜세웠다. 1세 내외는 붙잡고 일어서서 밀고 걷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목제 붕붕카에 리본을 붙여 선물했었다. 그 집에는 어린이 자전거 만한 포인터(사냥 수렵용으로 개. 날렵하고 에너지가 넘친다)도 세 마리나 있어서, 맥스가 걔들과 같은 속도로 뛰어다니려면 아주 제격이었다.
점심도 먹고 촛불도 끄고 모두는 수다를 떨었다. 나는 사실 배달 받은 그대로 들고 온 다이슨 청소기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영 뜯어보기가 뭐해서 그냥 들고 왔는데 너무 궁금하다며, 선물은 언제 뜯냐고 묻자 애니가 그럼 이참에 선물 오픈하자고 모두를 불러보았다. 맥스는 선물 포장을 뜯고, 애니가 두꺼운 골판지 상자를 뜯어 열었다. 애니는 "와!! 다이슨이야!!" 하고 소리지르며 기뻐했고, 맥스는 이게 뭐지 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금새 맥스 아빠가 가서 조립해 돌아왔고 "맥스, 너 전용 다이슨 청소기야!" 하고 건네주었다. 맥스는 손을 털고 일어나 청소기를 잡더니 그립감 좋게 밀었다 당겼다 하며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손님들 모두는 깔깔거리며 야 저거 제대로라며 즐거워하며 맥스를 지켜보았다. 맥스는 청소기를 밀고 당기며 놀더니 이내 청소기를 끌고 온 마당을 뱅뱅 돌기 시작했다. 수영장도 끼고 한 바퀴 돌고, 풀숲 흙바닥도 끌고 갔다가, 계단에 막히면 끙끙거리고 끌며 한참을 돌아다녔다. 어른들이 자기네끼리 이야기하며 잊어버렸다가 쳐다보면 맥스는 아직도 청소기를 끌고 노는 중이었다. 애니는 쟤 아직도 저거 끌고다닌다며 웃더니, 다른 선물도 열어보자고 맥스를 불렀다.
"맥스! 니가 제일 좋아하는 음메 소(moo-cow)랑 자동차(car) 있다!!"
맥스는 한창 음메소와 자동차에 빠져있던 차였다. 손님들은 그 소식을 듣고 그에 맞는 선물들을 준비해 왔고, 맥스는 들고있던 청소기를 수영장 옆에 내려놓고 달려왔다. 사실적인 소 모형, 1/16 크기의 클래식 카 모형, 헬리콥터가 움직이는 책, 자동차가 줄줄이 매달린 자동차. 맥스는 선물 하나 하나를 뜯어보며 "무~카우!!", "카!" 하며 즐거워했다. 이를 조용히 지켜보던 또 한 명의 2살배기가 있었으니, 맥스의 사촌 밀리였다.
밀리는 맥스의 둘째삼촌의 딸로, 맥스보다 한 달 나이가 많다. 맥스가 상자를 열고 청소기를 들고 돌아다닐때, 밀리는 비밀리에 굉장히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맥스가 다른 선물을 뜯느라고 청소기를 내려놓자, 밀리가 가서 청소기를 들었다. 앞뒤로 자신감있게 밀더니, 역시나 청소기를 밀고 온 마당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저 멀리에서 진지하게 집중하고 있는 밀리를 발견했고, 모두가 빵 터졌다. 한참 무카우와 자동차를 가지고 놀고 있던 맥스는, 밀리를 발견하자 무카우와 자동차를 내팽겨치고 청소기로 돌아갔다. 밀리가 청소기를 내려놓았고, 맥스는 다시 청소기를 끌고 30분을 넘게 돌아다녔다. 애니는 단연 최고의 선물이라며, 내 아동학 석사학위가 단연 쓸모가 있노라고 웃었다. 밀리 엄마 조이는 어디서 샀는지 자기도 하나 사야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후, 애니와 조이의 인스타그램에 사진과 동영상이 올라왔다. 애니는 배터리를 넣어서 작동한다며, 아들내미가 드디어 청소하는데 쓸모가 있겠노라고 써 놓았다. 사진속 맥스는 거실을 청소중이었다. 밀리의 동영상은 얼마 전 4월에 올라왔다. 밀리는 타호에 사는데, 거기는 4-5월까지 눈이 쌓여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동영상 속 밀리는 다이슨으로 눈 덮인 드라이브웨이를 청소중이었다. 남편과 나는 한참을 웃었다.
사실 영유아 전문가로서, 어린아이들을 돌보고 교육한다는 것은 크레딧을 받기 어려운 일이다. 잘한 일은 표가 나지 않고, 증명해 내기도 쉽지 않다. 많은 경우,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나 선생님들은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희끗희끗하고 어두운 안개에 갇히기 쉽다. 몇 년이 지나면 아이들은 자연히 나를 잊어버린다. 신기한 곳, 재미있는 일, 새로 만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두 세 살 적 선생님을 기억하기는 쉽지않다. 지난 십 몇 년여동안 내 손과 품을 직간접적으로 거쳐간 아이들은 몇 백 명이 되겠지만, 대부분은 나를 기억조차 못할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왜 하는 것인가. 맥스와 밀리는 사실 나를 거의 모른다. 일 년에 두 세 번 이나 볼까 스러운 엄마 아빠의 사촌의 아내를 기억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아이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다이슨 청소기를 처음 만났던 때의 설렘, 청소기를 끌고 마당이며 거실이며 눈 덮인 드라이브웨이를 온종일 끌고 다니며 놀았던 즐거운 기억은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청소기를 끌고 당기며 놀았던 것이 다른 대근육 활동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고, 청소기 자체에 관심을 가져 분해해보고 싶어할 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의 의미는, 그 아이에게 있어 "나"라는 어른의 성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전문성으로 제공한 좋은 경험이 이후 아이의 새로운 경험과 발전에 이바지할 즐거움과 잠재력을 기반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여기서 동료들 사이에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모두에게 어린시절은 단 한 번 뿐이다. 나는, 우리는 그 단 한 번 뿐인 어린시절을 즐겁게, 의미있게,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자라도록 돕는다. 그것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