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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io Library Mar 31. 2024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밥먹기

이 곳에 샌프란시스코 맛집이란 단어는 너무 가볍다

나는야 90년대의 어린이. 한 대 뿐인 티브이에서 틀어주는 영화 혹은 비디오대여점(세상에 비디오대여점이라니..)에서 빌려오는 것들은 주로 80-90년대에 나와 흥행한 헐리웃 영화 - 나홀로집에1, 2, 다이하드, 애들이 줄었어요, 귀여운여인, 더 록, 그렘린, 터미네이터... - 들이었다.


특히나 나홀로집에를 볼 때면, 80-90년대 특유의 느낌을 좋아한다. 뭔가 맥시멀리스트의 전성시대였던 것 만 같은 그 느낌. 정신없는 패턴의 벽지, 우든패널 벽, 독특한 색깔의 식탁과 의자같은 것들이 분명히 다 하나 하나 보면 정신이 없는데 모아 놓으면 왠지 따뜻하고 아련한 크리스마스 느낌이 난다고 할까?


오늘 소개 할 식당은 바로 그런 곳이다. 예전에는 그 근방에 살아서 자주 갔었는데 요즘엔 차를 타고 나가야되서 전 만큼 자주는 못 가는 중. 오늘은 몇 년 전 남편이 잘 못 사 놓은 욕실 부품을 페이스북에다 내놨더니 누가 산다고 해서 그걸 팔러 나가는 김에 아점을 먹으러 나갔다 (미국 당근이라고 할까?ㅎ)


넓은 패티오도 있어서 날이 좋을 땐 밖에서 식사할 수도 있다.


베이브릿지가 한눈에 보이는 전경. 하늘이 너무 예쁘다


이 식당은 푸른 바다를 훤히 볼 수 있는 엠베카대로에 위치해있다. 식당 뒤로 샌프란시스코 베이에리아(만 지역)을 가로질러 샌프란시스코와 이스트베이를 잇는 베이브릿지가 한눈에 보인다. 가끔은 군용 항공모함이 정차하기도 하는데 (이유는 모르겠음) 오늘이 그 날이었다. 오른쪽에 보면 회색 물체가 바로 항공모함.


내부를 들어가면 바로 앞에 호스트가 있고, 인원수와 실내/실외 자리를 선호 여부를 물어 본 뒤에 자리로 안내해 준다. 오늘은 조금 쌀쌀해서 내부에 앉았다.


오래된 미국 레스토랑느낌.

실내로 들어오면 80-90년대 미국 레스토랑으로 들어온 느낌을 받는다. 별 것 아니어 보이지만 사실 요즘엔 아주 고급 레스토랑이 아니고서야 잘 하지 않는 디테일들이 숨어있다. 정성스럽게 세탁하고 다려서 칼각이 잡혀있는 하얀 테이블보에, 화병에 꽂힌 꽃들은 가짜가 아니라 생화다. 언젠가 물어봤는데, 매일 아침 샌프란시스코 내에 있는 꽃시장에 가서 사 와서 꾸며낸다고 했다. 창 밖으로는 베이브릿지와 바다가 보이고 벽에 달린 스콘 조명, 어두운 색감의 우든 패널 벽, 세상 이상할 것 같은 초록색 나무 의자가 신기하게 어우러져서 아늑하다.



자리에 앉으면 주문을 받기도 전에 바로 물과 식전빵(?)을 가져다준다. 이게 이 집의 두 번째 포인트.



이건 바로 베이글 칩! 이 레스토랑은 베이글을 직접 만드는데, 그 베이글을 슬라이스해서 바삭하게 구워내 버터와 함께 나온다. 이게 정말 맛있다. 바삭바삭하고, 고소하고, 정신을 차려보면 다 먹고 없다. 돈 받지 않냐고? 아니, 무료다. 이걸먹으면서 메뉴를 본다.



샌프란시내 Sit-down restaurant (앉아서 먹는 레스토랑을 뜻하는 말로, 테이크아웃 같은 곳이 아닌 웨이터가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내 주는 적당히 격식있는 식당을 의미한다) 브런치 가격은 보통 18-28불. 여기는 메인메뉴 중 가장 비싼 것이 19.98이고, 웬만한 메뉴는 10-13불이다. 샌프란시스코 내에서 테이크아웃이 아니고서야 이런 가격으로 식사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메뉴 구성도 굉장히 다양한 편이라서, 무얼 먹을까 고르는 재미가 있다. 나는 보통 연어가 들어간 스크램블이나 베이글을 먹고 남편은 루벤 샌드위치(유대인 음식인 절인고기로 만든 샌드위치)를 먹는데, 오늘은 다른 걸 시켰다. 남편은 아이스라테에 남서부식 닭고기 해쉬, 나는 버거와 커피를 시켰다.


잠깐팁: 미국에서 보통 버거를 시키면 두 가지 질문을 기본적으로 물어본다.

1. What kind of cheese would you like to have? 혹은 그냥 짧게 What kind of heese? (어떤 치즈로 드릴까요?)
- 본인이 특이 원하는 치즈가 있으면 물어봐도 된다. (What do you have?) 그럼 보통은 짧게 2가지에서 4-5가지 정도 말해주는데 그 중에 골라서 대답하면 된다. 잘 모르겠으면 그냥 만만하게 체다나 스위스로 가자.

2. How would you like it(혹은 burger) cooked? (고기 어떻게 구워드릴까요?)
- 스테이크처럼 고기패티 굽기 정도를 묻는다. 아무것도 안 물어보면 보통은 미디움이 기본설정. 가게마다 다르지만 미디엄을 얘기하면 중간이 핑크빛으로 나오고, 웰던으로 얘기하면 속까지 다 익혀서 나오니, 핑크빛이 싫으시면 웰던으로 얘기하는 편이 좋다.



음식을 기다리는 사이 식당을 돌아봤다. 내일이 부활절인데, 그래서 토끼와 계란으로 잔뜩 꾸며놨다. 약간 촌스러워서 더 귀엽다.


지금 보니까 토끼유모차 바퀴가 뒤집어졌네욯ㅎㅎ


미국에는 보통 부활절이 종교적인 의미 없이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명절(?)로 꼽힌다. 바로 이스터헌트 때문인데, 계란모양 용기에 사탕이나 초콜릿, 작은 장난감을 넣고 숨겨놓으면 찾기 놀이를 한다. 이게 꽤나 본격적이라서, 토요일 내에 이 근방 모든 도시에서 공원 한 켠을 꾸며 아이들을 위한 이스터헌트 이벤트를 열었다. 토끼 인형옷을 입은 이스터버니가 나오기도 하는데 나는 당최 걔들 눈이 너무 무섭다. 왜 대체 귀엽게 안 만들고 무섭게 만드나 모르겠다. 어린 아기들은 울기도 한다. 나는 싫어해 사진을 넣고 싶지 않으나 굳이 궁금하신 분들은 Easter bunny를 구글에 찾아보시면 된다ㅋㅋ




사실 내가 이 집을 가장 좋아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있다. 이 곳은 1970년대에 지어진 사회적기업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해서 번창한 이후로 현재는 미국 내 다른 다섯개 도시에도 시설이 있다. 이 한 블록 전체가 이 단체이고, 한국으로 치자면 마치 아파트단지 처럼 되어있어서 1층에는 이 식당을 비롯해서 다른 가게들이 입점해 있고, 윗층은 주거시설이다.


이 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전 갱단 멤버들, 범죄자들, 노숙자들, 혹은 그 외에 사회교화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다. 들어올 때에는 최소 2년은 프로그램을 마치도록 서약을 하고, 단지 내 주거시설에서 살며 단체의 여러가지 사업에 참여해 일하며 생업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게 된다. 이 식당은 이 기업의 주요 사업 중 하나이고, 이 밖에도 이사, 이벤트/케이터링, 원예, 세탁, 상영관 등등 다양한 업종을 운영하고있다. 이들은 여기서 살며 사회에 나가 정직히 일하기 위한 생업기술을 익히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의사소통하고 함께 일하는 사회정서적 규칙도 배운다. 폭력/음주/마약을 하는 게 들통나면 당장 프로그램에 쫓겨난다.


이 단지의 일대는 샌프란시스코의 프라임지역으로, 근처 렌트는 거실하나/방하나에 400만원을 호가한다. 바로 앞에 바다가 보이고 걸어서 5분 내에 야구장, 15분 내에 고층건물이 즐비한 시내로 갈 수 있는 곳.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이들은 여기에서 무상으로 거주하고 일을 배우며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공부를 해서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따거나 대학교 수업을 들을수도 있다. 서로 돕는 시스템도 있다. 내가 만약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보고 합격했다면 같은 목표가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다면, 새로 들어온 이에게 요리를 가르쳐 줄 수도 있다. 그래서 질 좋은 음식과 서비스를 낮은 가격에 제공할 수 있다.


많은 경우 범죄자/노숙자들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했거나 잊어버렸다. 이들에게 그냥 돈을 주면 도박, 술, 마약에 탕진해 버릴 가능성이 높고, 노숙자 시설 또한 그 규칙이나 내부 텃세를 이기지 못하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이 진짜 필요한 것은 '정직한 사회구성원으로서 보람있게 대우받고 살아가는 경험'. 이 프로그램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거리로 내쫓는 대신, 이들에게 사회에서 살 수 있는 기술을 배우는 동시에 샌프란시스코의 아름다운, 바다 앞 숙소에서 정직하게 일하며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의미있는 삶의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서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수료하고 나간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식당은 특별하다. 직원들이 무서울 것 같아서 걱정이 되는가? 단연컨대, 이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 어떤 다른 식당보다 정중하고 격식있다. 아까 위에서 본 것 과 같이 각잡힌 테이블보와 테이블 위 생화는 물론이고, 전 직원은 잘 다린 새하얀 와이셔츠와 정장바지를 입고 나비넥타이를 메고 일한다. 모두에게 경어체를 쓰며 굉장히 정중하고 친절하다.


사실 이 단체는 판데믹 전에 카페도 하나 운영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카페였는데, 커피는 물론이고 맛있는 샌드위치와 점심/아점 음식을 팔았다. 딸려있는 정원은 언제나 아름답게 정돈되어있어서 거기 앉아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공부하는게 정말 좋았다.


여담이지만, 저 카페에 "애프터눈 티 세트"가 있었다. 가격대가 조금 있었는데 (있어봐야 다른 곳 보다는 훨씬 저렴했지만), 어느 날 궁금해서 남편과 함께 주문을 했더랬다. 보통은 아래 사진처럼 차와 함께 작은 2-3층짜리 트레이에 이것저것 작은 샌드위치나 쿠키가 나온다.


애프터눈 티 세트 예시 ㅋㅋ


정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저 쪽에서 울끈불끈한 장정 둘이서 뭘 낑낑거리며 들고나와서 저게 뭔가 했더니 점점 내 쪽으로 다가와서 가져온 걸 내려놓았다. 나와 남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진이 희뿌옇게 나와서 죄송합니다..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렇게 허리까지 오는 테이블 만한 3단 유리 선반을 통째로 들고 왔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우리 옆에 내려놓더니 씨익 웃고 꾸벅인사를 하더나 쿨하게 떠났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통유리로 되서 저 선반자체도 엄청 무거웠을텐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냥 애프터눈티 용 트레이를 하나 사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작은 샌드위치도 정말 귀여웠다. 아까 본 그 투박하고 거대한 팔뚝을 가진 사내들이 하트모양 커터를 가지고 요렇게 죠렇게 찍어냈을 모습을 상상하니 정말 귀여워서 못 견디겠더라. 음식이 꽤 많아서 배가 불렀지만 열심히 만들어주셨을 청년-아저씨 들을 생각하며 다 먹었다. 지금 사진을 보면서도 너무 웃기다.




오늘로 돌아와서, 음식이 금방 나왔다.


나는 이집 커피가 참 좋다. 작은 손잡이와 컵받침이 있는 작은 커피잔도 좋다. 여기는 라떼보다는 일반 커피에 우유를 달라고 해서 넣어먹는 걸 더 좋아한다. 커피는 얼마고 계속 리필을 해 준다. 라떼는 아주 정직하게 저렇게 큰 컵에 나온다. 한국의 여러 갬성 카페들이 배워야한다.


남편의 치킨 해쉬는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었는데, 담백한 치킨 동그랑땡 맛이난다! 위에 두 개는 계란이다. 나는 저게 마음에 들어서 다음엔 저걸 시켜먹을 예정이다. 내가 먹은 버거는 말해 뭘해, 고기 패티가 생각보다 두꺼워서 1.5센티미터는 되게 두껍고 육즙이 많은, 맛있는 버거 맛이다.



여기는 저녁 메뉴도 맛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Lamb shank 인데, 양고기 다리 한 뭉텅이를 뿌리채소와 함께 뭉근하게 끓여낸, 양고기 다리찜? 이라고 하면 맞겠다.



이 메뉴는 여지껏 다른 레스토랑에서 찾아보질 못한, 여기서만 본 음식이다. 방망이를 방불케하는 고기 양이 엄청 많고, 밑에는 매시드포테이토가 깔려있어서 촉촉하게 국물에 적힌 양고기 한 점을 올려 한 입 먹으면 정말 일품이다! 나는 양고기에 거부감이 없기 때문에 가장 좋아하는 메뉴. 저녁에 가면 90%는 저걸 먹는다.




식사를 하고 나면 디저트 메뉴도 준비되어 있다. 오늘은 배가 불러서 먹지 못했지만, 여기 초콜릿 퍼지 아이스크림 선데가 히트다.


엄청 커다란 높은 컵에 퍼지와 바닐라빈 아이스크림이 한 가득 나온다. 길라델리에 가면 초콜릿퍼지 아이스크림을 파는데, 그것과 거의 흡사한 맛이고, 가격은 6-70% 수준이다! 옛날에는 길라델리 아이스크림이 13불? 정도면 먹었었던 것 같은데, 요즘엔 텍스내고 팁내고 하면 18-19불은 되었던 것 같다 (또르르).








디저트를 권하는 웨이터를 뒤로하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나왔다. 아, 저 아이스크림을 먹었어야 했는데. 조만간 또 가야겠다. 사회로 나아가고자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돕고, 맛있는 음식도 저렴하게 먹고. 아름다운 바다와 경치를 보며 산책을 할 수도 있다.


샌프란시스코를 모르는 사람이 샌프란시스코 욕을 한다. 세상에는 손가락질만 하는 대신, 진짜 세상과 개인의 삶을 바꿀 이런 멋진 일을 하고 돕는 사람들이 많다. 선한 마음들이 많이 모여서 이 식당은 영영 문을 닫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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