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도, 문화도 다른 우리가 함께 한다는 것.
새로운 곳에서의 삶을 꿈꿔본 적 있는가?
나도 그랬다. 다만 그 삶은 내 기존 삶에 기반하여 한 달 내지는 몇 년 정도로 국한된 상상이었다. 유재석이 노래했듯이, 열심히 말하고 다녔더니 말하는 대로 되었고, 나는 연고도 없는 미국에 혼자 와서 일하고, 공부하고, 여행했다. 스스로를 먹여살리고 커리어를 만들어 나가고,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는 것. 새로운 것을 보며 배우는 그 충만한 느낌이 좋았다. 아예 미국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나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저 손에 잡히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경험하고 즐기려고 애썼다.
너의 눈동자는 참 아름답다.
연녹색에 푸른색이 조금 스며든, 거기에 밝은 회색을 한 방울 떨어뜨린 것 같은 신비로운 색.
보드라운 속눈썹과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카락이 잘 어울린다.
퇴근하고 저녁에 작은 레스토랑을 기다리는 동안 문 닫은 상점가를 구경하고.
맛있는 식사와 곁들이는 파인애플 맛 칵테일.
머릿털이 쭈뼛 서게 추운 샌프란시스코의 여름 밤, 우리는 옷깃을 여미며 가파른 언덕을 올라 차에 타자마자 히터를 튼다.
주말이면 비몽사몽 수업을 듣고나서 함께 구경하는 샌프란시스코. 반짝거리는 바다. 요트. 바다 건너 푸른 섬들. 바쁘게 언덕을 오르내리는 차와 케이블 카. 조금씩 넘어가는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나는 빅토리아풍, 동부풍, 스패니시 풍 예쁜 집들.
이 풍경을 내려다보는 푸른 잔디 공원 벤치에 앉아 눈을 감으면,
뛰노는 강아지들, 차가운 바람,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
비탈길을 타박타박 걸어 내려가 코너에 있는 작은 프렌치 레스토랑. 버터 바른 맛있는 바게트 빵과 프렌치 비프스튜. 너와 함께 데이드림 같은 샌프란시스코의 오후.
남편과 연애할 시절 써 놓은 메모를 보았다. 이제는 삶의 든든한 동지 같은 남편인데, 저 때 메모를 보니 우리도 꽤나 간질간질한 연애를 했구나 싶다. 나는 남편과 결혼하게 될 줄 몰랐다.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였던 듯 하다. 어쨌든 나는 단기로 미국에 머무르는 중이었고, 국제결혼이란 나와는 너무 먼 어려워 보이는 단어였으므로. 여차하면 그저 즐거웠던 샌프란시스코의 꿈으로 남게 되었을 듯한 연애.
나는 흔히 말하는 "Love you FOREVER" 라든지 "너는 내 운명이야" 라는 말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미국에서는 결혼식 때 'Wedding vow'라고 해서 서로에게 하는 맹세 겸 메세지 같은 것이 있는데, 그 예를 찾아봐도 뭐 매번 너를 죽을 때 까지 사랑한다든지, 우리는 신이 맺어준 운명이라든지 같은 것만 나와서 쓸 때 굉장히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언어도, 문화도, 살아온 환경도 모두 다른 우리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서 여지껏 그럭저럭 함께 잘 살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함께 서로를 받아들이고 변화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이 대답이 너무 지극히 한국인스럽다고 했다. 로맨틱하지 않다고.
나는 반대로 설득했다. 우리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 많은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 함께 노력했는데, 그냥 운명이 다 해줬다고 하기엔 너무 아깝지 않냐고. 나는 가족도 친구도 없는 새로운 외국에 와서 일하고, 공부하고, 현지의 문화에 적응하려 무던히도 애썼고, 너는 나를 다독여 주며 생판 모르는 처음보는 문화를 절반쯤 열린 태도로 조금씩 적응하고 배워 나가지 않았냐고.
결혼을 해서 두 인간이 함께 산다는 것은, 각자 자라온 환경, 문화, 관습을 모두 가져와 한 데 내어놓고, 잘 고르고 섞어 새로운 둘만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서로 싫은 것도, 좋은 것도 다 섞여 있는 터라 영 합의하기가 쉽지 않다. 몇 가지는 내어주고, 어떤 것은 무슨 수가 있더라도 지켜야 한다. 함께 살 수록, 남편과의 매일을 보며 글을 쓸 수록, 나는 한국에서의 작은 것들을 - 엄마 아빠와 함께했던 어린시절과 열심히 살았던 20대의 삶과 같은 - 우리 둘의 문화에 내어놓고 지키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김치도, 떡볶이도, 심지어는 추석이나 설날같은 명절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굳이 나까지?' 같은 느낌. 하지만 외국에 나와 어른이 되어 살아가는 나는, 내가 아니면 나를 위해 나의 기억과 문화를 지켜줄 사람이 없다. 그래서 복날에 삼계탕을 굳이 만들어서 먹게 되고, 엄마가 만들어 주던 따스한 닭죽을 추억하며 남편과 나누게 된다. 남편에게도 묻는다. "엄마가 만들어줬던 거 중에 뭐가 제일 맛있었어?" 남편의 어머니는 요리에 그닥 취미가 없으신 분이라(남편 말로는 떠오르는 게 많지 않단다) 이것 저것이 들어간 파스타와 스테이크 정도지만, 우리는 싫어하는 것을 빼고 좋아하는 것을 넣고 해서 우리가 좋아하는 식으로 만든다. 우리 둘의 문화는 남편이 자라온 아이리쉬+프랑스+미국의 원가족 문화와는 다르고, 내가 자라온 한국인 문화와는 또 다르지만, 그 모두가 숨쉬는 새로운 반짝반짝한 것.
샌프란시스코는 모험의 외국이 아니라 매일이 되었다. 샌프란시스코는 편안해졌지만 그 속에서 나의 문화와 언어는 끊임없이 고민을 맞이한다. 장애물도 있고 어려운 점도 있지만, 우리는 헤쳐나갈 것이다. 새로운 우리만의 문화를 만들어 나가면서. 우리가 아이가 생긴다면 그 아이에게도 넘겨줄 따뜻하고 튼튼한 집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