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긴, 한국에서 5시간 비행기 거리면 딴나라니까
캘리포니아의 대도시는 대체로 계절의 변화가 별로 없다. 샌프란시스코도 몇 주를 제외한 일년 내내는 거의 봄-가을 날씨이기 때문에 가끔 어쩌다 샌프란 근교에 눈이 오는 때면 뉴스에 나고 SNS에 눈 왔다고 도배가 될 정도.
이런 마일드한 기후 때문에 살기는 참 좋지만, 가끔 4계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캘리포니아 내에 있기는 하지만 30분-4시간 정도 운전해 가야한다). 물론 눈 치우고 옷 다 정리해서 계절마다 넣고 빼고 하거나 겨울에 수도가 동파하거나 이런 것 말고, 온 산을 빨갛고 노랗게 휘감는 단풍의 파도나, 흐트러지게 떨어지는 눈꽃 같은 꽃잎. 첫 눈 이 왔을 때 쨍 하게 시려운 눈과 코 같은 아름다운 (기억으로 포장되어 좋은 것만 기억나는 ㅋㅋㅋ) 것들 말이다.
남편 친척의 초대로, 메인 주에 가게 됐다. 그 근처의 6개 주(메사추세츠,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메인, 뉴 햄프셔, 버몬트)를 묶어 '뉴잉글랜드'라고 부르는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처음 영국인들이 미국 땅에 정착하기 시작한 곳이다. 남편도 나도 거의 처음 가 보는 것이라 신이 좀 났다. 게다가 10월 후반 즈음이니 운이 좋으면 흐트러지는 단풍과 낙엽이 흩날리는 '진짜 가을'을 즐길 수 있을 것이었다. 원래 계획은 사실 캐나다 몬트리올에 가서 차를 타고 로드트립을 하면서 국경을 건너 메인 주로 내려오는 것이었으나 아쉽게도 몬트리올에서 차를 렌트해서 미국 보스턴에 반납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포기하고 그냥 메인 주 근처를 돌아보는 것으로 정했다. (이 두 도시는 기차연결도 없고.. 버스가 이용이 가능하긴 한데 거의 시간이 두 배가 걸린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보스턴까지는 갈 때 비행기로 5-6시간, 돌아올 때 6-7시간이 걸린다. 왜 메인주 가면서 보스턴에서 내리냐고 한다면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가까운 직항은 보스턴이기 때문. 한국에서 이 정도 거리면 괌 보다 멀고 싱가포르정도 되는 건데 새삼 느끼는 거지만 미국땅 참 넓다.
미리 렌트한 차를 픽업하는데, 직원이 넉살 좋게 남은 차 중에서 아무거나 고르라고 한 덕에 낸 돈보다 훨씬 업그레이드 된 아우디를 빌리게 됐다. 차를 타고 도시를 빠져나오면서 벌써부터 이색적인 느낌이 확 풍겼다. 일단 사람들이 고속도로에서 1차선은 추월차선임!을 굉장히 잘 지켰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그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음..), 직선으로 뻗은 도로에 울긋불긋 단풍이 양 옆으로 가득 찼다. 보스턴(메사추세츠주)에서 얼마 달리지 않아 강을 지나면서 뉴 햄프셔 주로 진입했고 , 다시 조금 지나자 메인 주에 들어섰다. 아무래도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남/북/동으로 아무리 차로 달려도 최소 3-4시간까지는 계속 캘리포니아라서 이렇게 주 경계를 자주 넘나들 일이 없기 때문에 이런 작은 것도 재밌었다.
첫 날에 숙소에 도착해서 재밌는 일이 있었지만 그 썰은 나중에 풀기로 하고, 일단 우리가 지낸 곳은 케네벙크(Kennebunk)라고 하는 작은 마을이었다. 사실 메인에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갔다. 그냥 운이 좋으면 단풍이 있겠거니, 좀 춥겠거니, 랍스터를 먹겠거니 하고 한 게 다였으므로.
사실 이 작은 도시는 동부의 해변을 끼고 있는데, 이 해변을 따라서 가장 큰 도시인 '포틀랜드' (오레곤주에 있는 포틀랜드 아님)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소소하고 귀여운 작은 마을들이 많이 있고 커다란 크루즈쉽이 잠시 정착하는 관광지였다. 여름에는 근교에서 해수욕 하러 모여든 사람들로 넘쳐나는, 엄청 인기있는 동네였다. 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가게들이 많이 있다. 관광객을 제외하고는 주로 백인 어르신들이 사는 조용한 동네들. 관광지라는 걸 아예 모르고 가서 처음에는 대체 인구도 없는 이 작은 마을에 기념품 가게가 왜 이렇게 많은가 했었다.
저 오른쪽의 가게는 들어가서 구경하고 물건을 고르고 났는데 주인이 없었다(으잉?) 한 5분 쯤 기다리니 중년 즈음 되보이는 여성분이 헐레벌떡 들어오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근처에 사탕가게에 딸 남자친구 줄 할로윈 캔디를 사러갔다 줄이 길었노라고 했다. 볼일을 보러 나가면서 가게 문도 닫지 않고 외출중 표시도 걸지 않는 평화로운 메인주 가게주인의 패기ㅋㅋㅋ.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점심시간을 즈음해서 크루즈 선이 정박하는데 그 때 관광객이 쏟아져 나와서 사탕가게에 줄이 길었노라며, 혹시 점심을 먹을거면 그 시간에는 식당에 자리가 없을 것이니 그 전이나 후에 가 보라는 꿀팁까지 선사하셨다.
좀 답답한 것은, 많은 이들이 날씨가 따뜻하고 좋은 봄-여름에 집중적으로 방문하기 때문에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곳이라면 거의 10월 중순즈음엔 문을 닫는다. 우리는 그걸 모르고 가서 어디만 갔다 하면 "Closed for the season. See you again in the spring!" (시즌 지나서 문 닫음. 봄에 다시 만나요!) 하고 써 있었다. 한국인으로서 아니 10월 부터 4월까지 아예 문 닫고 장사를 안한다고? "배가 불렀구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달까. 하도 겨울에 춥다 춥다 하기에 표를 찾아봤더니 평균 최저기온 제일 추울 때가 포틀랜드에 17화씨 (섭씨 -8.3) 라고 하니, 철원의 제일 추운 달 평균 최저기온이 섭씨 -8도라는 걸 봐서 철원과 비슷한 모양이다.
우리는 첫 이틀에 케네벙크포트(Kennebunk Port)와 오군큇(Ogunquit)이라는 곳을 둘러봤는데, 전부 차로 30분 정도 거리밖에 안 되고 동네가 아기자기해서 거닐기 좋았다. 오군큇에는 Ogunquit Beach라고 하는 아주아주 커다란 해변이 있다. 썰물 때 가면 그 해변의 길이와 크기가 굉장하고 모래가 아주 보드랍다. 어디서 말하기는 미국의 10대 해변이라고 하니 여름에는 엄청 사람 많은가 보다. 오프시즌이라 우리가 갔을 때에는 한산한 편이었다. 이 마을 안에 Marginal Way라고 하는 해변을 따라 걷는 산책길이 또 유명한 듯 해서 가 봤는데, 바다 뷰와 해변을 따라 지어진 건물을 구경하는 게 아주 매력적이었다. 여긴 사람이 많았다.
이전에 '할로윈 데코에 진심인 동네' 글이 이 동네였다. 크리스마스에 가면 또 그 장식 구경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춥긴 하겠지만.
그리고 이상하게 이 작은 다운타운들에는 주차할 곳이 별로 없다. 주차 공간을 찾으면 맨 30분만 가능하다고 써 있다. 여기는 당최 집에서 가게까지 도보로 다닐 수 있는 동네가 아닌데, 도대체 사람들은 어디에다가 주차를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내내 들었다. 메인 손님들이 크루즈 관광객이라서 그러나? 아닌데, 여름에는 차 몰고들 많이 올텐데. 여기 동네에 마트도 있고 카페도 있는데 그럼 동네 사람들이 오고 싶을 때는 어떻게 주차하는 거지? 동네사람 차번호는 주차 벌금을 안내나?
어찌됐든 몇 시간동안 장기로 주차할 수 있는 편리한 곳은 해수욕장 앞에 있는 커다란 주차장이지만 주차비가 엄청 비싸니 주의.
참, 케네벙크포트에 'Maine-ly Drizzle' (2 Ocean Ave, Kennebunkport, ME 04046) 이라고 하는 발사믹식초와 올리브오일 전문점이 있다. 그게 뭐 특별하겠냐만은 여기서는 정말로 다양한 맛의 발사믹과 올리브오일을 시음해 볼 수 있다!
종류가 엄청나게 많은데, 그냥 발사믹에 오일도 이렇게 다양한 맛을 낼 수 있구나 감탄을 하게 된다. 발사믹식초는 초콜릿 맛, 탠저린(귤과) 맛, 피치 맛, 화이트발사믹 등 여러 개를 맛 봤는데 달달하니 엄청 맛있다. 주인 아주머니께서 엄청 친절하셔서, 잘 어울리는 올리브오일과 발사믹식초 조합을 골라 믹싱해서 샐러드 드레싱을 즉석해서 만들어주고 시음도 시켜 주신다! 바질 맛 오일과 발사믹을 섞어 카프레제 샐러드 드레싱을, '고추장 올리브오일'과 피치맛 발사믹을 섞어 닭고기 요리할 때 쓰셨다고 맛 보여 주시기도 했다. 고추장 오일을 설명하실 때는 새로 나온 거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하셨는데, 물론 발음은 고쭈좽 이어서 '고-추-장'이라고 알려드렸다. 한국인이라는 걸 안 이후에는 내 앞에서 발음하기를 좀 주저하셨지만. 고추장이 이 미국 동쪽 끝의 백인마을에까지 진출했다니 참, 신기할 따름이다.
큰 병을 살 수도 있고 비행기 기내용에 넣을 수 있는 작은 사이즈의 샘플도 판매한다. 작은 사이즈는 6-7불 정도 했던 듯. 우리는 샘플 두 개를 사가지고 왔다. 고추장 올리브오일 마음에 들어서 사고 싶었는데 그건 신제품이라 큰 병밖에 없다길래 가방 체크인 하기 싫어서 안 샀다. 근데 알고 보니 수입/배부처가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도 있어서 (샌프란시스코 바로 옆 도시..) ㅋㅋㅋㅋ 동네에서도 살 수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저기서는 여러가지를 다 맛볼 수 있고, 꿀조합도 추천해 주시니 근처에 가게 되면 방문을 강력추천한다!
시차 적응한다고 가까운 곳을 중심으로 둘러보았으니, 이번에는 조금 멀리 나가볼 차례.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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