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 1101호 사설]
파면당한 전 대통령 박근혜씨 모습이 23일 공개됐다. 지난 3월 구속된 지 53일만이다. 이날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첫 공판을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도착한 박씨는 국정농단 공동주역이었던 최순실과 나란히 피고인석에 앉았다. 역사적인 장면이면서 한편으론 부끄러운 장면인 이날 법정 풍경을 많은 언론이 보도했다.
박씨가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이동할 땐 방송사들이 열띤 취재경쟁을 벌였다. 일부 방송사는 법무부 호송차에 탑승한 박씨의 모습을 찍기 위해 차량 가까이 근접취재까지 했다. 박씨가 청와대 관저에서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를 땐 질문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기자들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하이에나 언론의 특성이 이번에도 여실히 드러났다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이유다.
‘피고인’ 박근혜가 법정에 선 날은 노무현 전 대통령 8주기 추도식이 열린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이날 박근혜를 취재하는 기자들의 모습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 소환될 때를 연상시켰다. 당시 많은 언론이 경남 김해에서 서울까지 노 전 대통령이 탄 차를 추적하며 취재경쟁을 벌였다. 일부 방송사는 헬기까지 띄워 생중계했다. 언론은 사태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 큰 관심이 없었다. 대중들에게 잘 팔리는 상품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정치·상업적으로 이용하기에 급급했다. 반성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서거 이후 지금까지 한국 언론이 변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전직 대통령의 8주기 추도식이 열린 날, 파면당한 또 다른 전직 대통령은 구속된 상태로 법정에 출석했다. 지루한 재판과정이 앞으로 이어지겠지만 분명한 것은 국정농단에 동참했던 많은 인사들이 처벌 받거나 죄 값을 치르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19대 대선에서 국정농단 주역이었던 정치세력들에 대해 준엄한 심판을 내렸다. 그 결과, 정권은 교체됐다.
하지만 여전히 변화의 무풍지대로 남아 있는 곳이 있다. 언론이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검찰개혁을 비롯한 여러 개혁조치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지만 언론계에선 미풍만 감지된다. ‘이명박근혜’ 정부를 거치는 동안 방송의 불공정성과 편파보도에 앞장섰던 공영방송 경영진 상당수가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여전히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일각에선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언론사 경영진 임기를 보장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론을 제기한다. 극심한 편파보도를 했던 한 방송사의 경우 언론사 사장 임기를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의 리포트를 내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방송 정상화를 요구하는 수많은 언론인을 해고하고 내부 문제제기를 인사보복과 소송 등으로 짓누른 MBC경영진,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 KBS를 정권의 이익을 위한 ‘홍보방송’으로 전락시킨 KBS경영진, 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 편집총국장제를 폐지해 편집권 독립을 무력화시킨 연합뉴스 경영진 등은 임기 보장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 이들은 자신들이 저질렀던 과오에 대해 반성하면서 하루라도 빨리 물러나는 것이 최선의 길임을 알아야 한다.
조준희 YTN사장의 사의 표명이 주목되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된 공영언론사 사장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사의를 표명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그렇다. YTN정상화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는 이유다.
주목되는 건 조준희 사장 사의 표명 이후 공영언론사 구성원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KBS와 연합뉴스에선 경영진 사퇴를 압박하고 나섰고 전국언론노조 MBC본부 역시 김장겸 사장 퇴진 운동에 나섰다.
언론인들의 뒤늦은 자성 목소리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지난 9년 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다 정권이 교체된 후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는 언론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하지만 언론개혁은 정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언론노동자들에 의해 추진되고 완성되어야 한다. 늦었지만 언론구성원들이 그동안 쌓인 ‘적폐청산’에 시동을 걸었다는 점은 평가하고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 이번에도 일시적인 현상에 그친다면 언론의 신뢰회복은 요원할거라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