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의 별장, 더글라스 하우스
1963년. 말레이시아라는 나라가 생기고, 존 F. 케네디 미 전 대통령이 암살됐으며 비틀즈의 첫 정규 음반이 발매된 해. 우리 엄마가 이제 막 돌을 맞아 실을 쥐었던 해.
공통점이라곤 전혀 없는 것 같은 이 사건들이 공유하고 있는 게 단 하나 있다면, 아마도 오래된 책의 냄새일 테다. 누렇게 변색된 흑백 사진첩을 뒤적이거나 귀퉁이가 닳아 너절한 LP판을 꺼내야 추억할 수 있는 시절에서만 나는 냄새. 먼지 쌓인 책방이나 조명이 닿지 않는 도서관 한 구석에서 맡아본 적 있을 바로 그 퀘퀘하지만 정다운 냄새.
오래된 시절에 대한 얘기를 꺼낸 건 이 호텔에서도 그 묵은 책 냄새가 풍기기 때문이다. 엄마의 오동통한 손에 실꾸러미가 쥐어 진 그 해에, 아차산 자락에는 이 낮은 건물이 지어졌다. 더글라스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더글라스 하우스는 1963년 4월 8일, 당대 최고의 건축가 김수근의 지휘 아래 세상에 첫 선을 보였다. 건물의 명칭은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이름을 따왔다. ‘서울시 광진구에 웬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이름이?’ 쉽사리 연결되어 지지 않는 네이밍은 이 호텔의 유래를 살펴보면 납득할 수 있다.
워커힐 호텔은 한국에 마땅한 휴양지가 없어 일본으로 휴가를 떠나는 주한미군을 유치하기 위해 세운 호텔로, 워커힐이라는 명칭 역시 초대 미8군 사령관이었던 월턴 H. 워커를 기리며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더글라스 하우스는 이 호텔의 뿌리를 상징하는 건물이었던 것.
더글라스 하우스는 본래 그랜드 워커힐 서울의 별관으로 운영됐다. 그러다 2018년 4월 7일, ‘도심 속의 별장’을 모토로 새 옷을 갈아입고 그랜드 워커힐과는 별도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 도심 속의 별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랜드 워커힐 서울 정문에서 셔틀 리무진을 이용해야만 한다. 더글라스 하우스에는 차량 진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셔틀 리무진은 24시간 운영한다. 주차는 주차 타워 또는 그랜드 워커힐 서울의 발렛 서비스를 이용하면 되는데 투숙객에겐 발렛 서비스가 1회에 한해 무료로 제공된다.
그랜드 워커힐 서울의 정문에서 더글라스 하우스로 가는 셔틀 리무진을 요청하면 사진과 같은 세단이 곧 등장한다. 저 차를 타는 순간, 번잡한 도심과는 안녕이다.
리무진으로 5분이 채 안되게 이동하다 보면 드디어 고요한 별장에 도착한다.
나는 4월 초에 방문했는데 벚꽃으로 유명한 아차산 답게 호텔 부지 곳곳에서 벚꽃이 그 꽃망울을 앞다퉈 터뜨리고 있었다. 정신없이 창 밖을 영상으로 담으며 감탄을 하고 있었더니 리무진 기사님이 ‘좀 돌아가도 되죠?’라고 물으시곤 숨겨진 벚꽃 스팟을 알려주시겠다며 워커힐 곳곳을 차로 누비며 소개해 주시는 극강의 친절을 보이기도 했다. 어머, 시작부터 느낌이 좋다.
보통 호텔 리뷰를 쓸 때면 로비에 대한 평가의 초점은 대체로 서비스에 맞춰지게 된다. 즉, 체크인이 얼마나 신속하게 이뤄지는지, 응대는 얼마나 친절한지가 주된 평가 요소.
하지만 이 곳의 로비는 공간 자체가 주는 매력이 대단했다. 그다지 화려하지도 그다지 넓지도 않지만, 너무나 편안하고 안락한 분위기와 여기저기 놓인 앤티크한 소품들, 츠타야 서점이 큐레이션한 나른한 음악은 이 곳을 순식간에 숲 속의 별장으로 변신시킨다.
이 곳이 조용하게 유지될 수 있는 또다른 이유는 이 곳이 ‘노 키즈 존’이라는 데에 있다. 만 13세 미만의 아동은 동반할 수 없으니 어린 아이가 있는 투숙객은 그랜드 워커힐이나 비스타 워커힐을 선택해야 한다.
로비 한쪽엔 작은 난로가 활활 불탄다. 사실 진짜 불은 아니고 불을 가장한 가습기인데 꽤 그럴 듯해서 마치 침엽수가 가득한 숲에 캠핑을 온 것만 같은 기분도 든다.
앤티크한 소품들은 이 호텔이 지향하는 바를 한 번에 설명해준다. 오래됐지만 값나가는.
이 호텔은 1963년에 생겼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방치된 호텔은 아니다. 앞서 얘기했듯 불과 작년에 리모델링을 끝내고 재오픈한 호텔이기에 고개를 어느 쪽으로 돌리든 깔끔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모던함을 지향하진 않는다. 철저히 편안하고 안락하다.
직원들의 서비스 또한 그렇다. 친절하지만 부담스럽지 않다. 화장실이 어딨냐는 질문을 하면 화장실 앞까지 데려다 줄 것 같아 질문을 삼키게 되는 호텔들이 있다. 그러한 친절을 잘 누리는 타입의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아니기에 이 호텔의 친절함의 정도가 딱 좋았다.
로비에서 체크인을 마치고 객실키를 건네 받은 후에 객실로 이동했다.
객실 타입은 ‘더글라스 스위트’, 객실 요금은 358,160원.
더글라스 하우스는 총 3가지 타입의 객실을 보유하고 있는데, 더글라스 스위트는 세가지 객실 중 가장 상위 객실이다. 다만 일반 객실과 스위트 사이에 큰 가격차이가 나는 여타 호텔들과는 다르게 더글라스 하우스는 객실 간 가격 차이가 최대 10만원 수준이다.
* 더글라스 하우스 객실 종류
- 더글라스 딜럭스(27m²)
- 트레디셔널 스위트(53m²): 온돌 콘셉트의 낮은 침대, 좌식 테이블
- 더글라스 스위트(72m²): 발코니 2개, 해먹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트 객실 크기는 일반 객실의 세 배에 이른다. 이렇게 말하긴 그렇지만, 평당 요금은 스위트가 훨씬 저렴하다. 게다가 객실에 해먹이 있는 건 더글라스 스위트 타입이 유일하다. 더글라스 하우스 방문 예정이라면 스위트 객실을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인 소비일 수 있다는 얘기다.
더글라스 스위트의 시그니처인 해먹. 창 밖으로는 한강이 펼쳐진다. 우아하게 독서까지 할 것도 없다. 해먹에 누워 카톡만 해도 어찌나 달콤하던지. 이 곳이 번잡한 서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천편일률적인 화이트 톤 모던한 객실에 피로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더글라스 하우스의 인테리어가 분명 반가울 것이다. 우든 플로어는 물론 한쪽 벽면이 모두 원목으로 마감돼 자연 친화적 인테리어 감성을 듬뿍 느낄 수 있다.
곳곳에 자리한 푸릇한 액자는 쉼표의 역할을 한다. 호흡이 가라앉고 조금 더 늘어져 있고 싶게 만드는.
침대는 폴란드 구스를 사용한 최고급 베딩이라는데 이름이 아깝지 않게 꿀잠을 선사했다.
침대 양 옆의 협탁엔 기본적인 객실 컨트롤러와 전화기 외에도 예쁜 티볼리 오디오가 놓여 있다. 블루투스 스피커 기능도 있는 데다 음질도 상당해서 객실에서 기분 내기엔 그만이다.
한편, 옷장과 미니바, 금고 등은 객실 문을 열자마자 왼쪽에 있는 붙박이장 속에 들어 있다.
전기포트와 머그컵, 와인잔, 티백, 티스푼 등의 일반적인 구성이지만 발뮤다 전기포트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티볼리 오디오에 발뮤다 전기포트라니. 사소한 집기에 닿아 있는 호텔의 섬세함을 느낄 수 있다.
슬리퍼도 폭신해서 마음에 들었고 신발을 닦을 때 쓰는 슈 미트(Shoe mitt)도 준비돼 있다.
더글라스 하우스는 미니바를 무료로 제공하는데 무료 미니바라고 해서 기대는 금물이다. 맥주, 탄산수, 생수 각 2병 씩이라는 단출한 구성이기 때문! 단, 체크인 시에 웰컴푸드 개념의 과자를 몇 개 챙겨줘서 맥주에 곁들이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객실 바깥의 발코니에는 작은 탁자와 의자 두 개가 준비돼 있다. 이 호텔에서 정말 아쉬운 점 하나를 꼽자면 이 발코니인데, 바닥이 전혀 청소돼 있지 않았다. 야외에 노출돼 있는 발코니 특성상 청소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긴 하지만 슬리퍼를 신고 발코니에 나갔다 오면 객실에 슬리퍼 발자국이 한가득 남는 건 조금 너무하다.
다행히 객실에서 바라보는 뷰는 멋지다. 벚꽃철에 방문한지라 군데군데 물감처럼 번져 나간 분홍 빛이 감성을 더한다.
참고로 더글라스 하우스엔 한강 뷰 객실이 따로 없다. 예약 시에도 아차산 뷰만 있고 한강 뷰는 없었기에 이 곳에선 한강이 안 보이는구나 싶었는데 이렇게 탁 트인 한강 뷰라 조금 놀라웠다. 객실 체크인 시에 체크인을 도와준 직원이 ‘한강 보이는 좋은 뷰로 준비해 드릴게요.’라는 말을 했던 것으로 추측해보건대 아주 일부 객실에서만 한강 뷰를 즐길 수 있는 듯했다. 아마도 체크인 순서대로 한강 뷰가 배정되지 않을까. (오후 4시 전에 체크인)
욕실은 욕조+샤워부스 / 세면대 / 화장실 세 부분으로 나뉜다. 옆으로 길게 빠져 있는 구조라 욕실로 통하는 문도 침실 쪽과 출입구 쪽에 하나씩 위치해 있다.
욕실 가장 안쪽에는 욕조와 샤워기가 자리잡고 있다. 곡선이 돋보이는 욕조는 혼자 사용하기에 적당한 사이즈.
욕조 맞은 편에는 샤워기가 설치돼 있는데, 아로마 향기가 나고 비타민C 필터가 있는 샤워기 헤드를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샤워해보니, 확실히 물에서 좋은 향도 나고 물이 보다 미끈미끈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큰 효과가 있지는 않겠지만 기분 전환에는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어메니티는 비글로우(C.O. Bigelow) 제품. 옆에 놓인 비누는 동구밭에서 만든 제품이다. 동구밭은 발달장애인들이 직접 천연비누를 만드는 사회적 기업으로 원료 역시 직접 수확한 작물을 사용한다.
세면대는 2개가 널찍하게 자리잡고 있다. 거울 뒤에 설치된 간접 조명이 은은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양치컵이나 갖은 사이즈의 수건도 준비돼 있다.
세면대 아래 서랍에는 헤어 드라이기와 칫솔 & 치약, 샤워캡, 면봉, 화장솜, 빗 등 기본적인 물품이 있다.
화장실이 조금 난해한데,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문을 닫아도 내부가 훤히 보인다. 게다가 화장실 바로 맞은 편에 거울과 화장대가 있어서 변기에 앉으면 맞은 편 거울에 내 얼굴이 보이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한다. 대체 무엇을 의도한 구조인지 나같은 범인은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고요한 별장에 어울리는 건 TV가 아니라 책이다. 더글라스 하우스의 대표적인 편의 시설인 더글라스 라이브러리는 더글라스 하우스 1층에서 24시간 내내 투숙객을 기다린다.
이 곳의 책들은 ‘최인아 책방’에서 큐레이션 했는데, 다양한 주제 별로 선정된 서적들이 책장에 진열돼 있다. 호텔에 오기 전 가장 기대했던 공간이 라이브러리였는데 생각보다 협소한 공간이라 ‘앗’하는 생각도 잠시, 취향에 따라 고른 책을 펼치는 순간 라이브러리의 규모야 크게 대수롭지 않은 부분이라는 걸 깨닫는다.
자유로운 독서를 돕는 해먹과 의자, 쇼파들. 책은 외부로 반출 불가이기 때문에 오롯이 라이브러리에서만 독서를 즐겨야 한다. 대신 24시간 운영하기 때문에 내킬 때 언제든 방문할 수 있다.
더글라스 투숙객이라면 객실보다 라운지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지도 모른다. 라운지에서는 시간대 별로 다양한 서비스가 제공되기 때문에 알차게 누리는게 좋다.
* 더글라스 라운지 이용 안내
- 라이트 스낵 15:00~17:00
- 더글라스 아워 19:00~21:00
- 라이트 브렉퍼스트 07:00~10:00
라이트 스낵 시간에는 매일매일 달리 준비되는 간단한 스낵이, 더글라스 아워에는 각종 주류를 비롯한 간단한 안주가, 라이트 브렉퍼스트 시간엔 (정말) 가벼운 아침식사가 준비된다.
라운지도 객실처럼 원목이 주로 쓰여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라운지 밖으로는 한강도 펼쳐져 시간대별로 다른 한강의 모습을 즐길 수 있다.
라운지 내에 좌석은 많은 편이지만 창 측 좌석은 몇 자리 없으므로 창가 쪽 테이블에 앉고 싶다면 부지런함을 장착하는 게 좋다.
커피와 차는 라운지 이용 시간(07:00~22:00) 내내 즐길 수 있는데 커피는 폴 바셋 원두를 사용하고 있었다.
라이트 스낵 시간엔 셀프 카나페가 제공됐다. 카나페 토핑과 소스는 매일 달리 준비된다.
간단한 구성. 왼쪽에 보이는 반건조 토마토가 정말 맛있었다.
더글라스 아워에는 양주를 비롯해 와인과 맥주가 무제한 제공된다. 칵테일을 직접 만들어 먹는 셀프 칵테일 바가 있으니 바텐더 흉내를 내보아도 좋겠다.
와인은 4종이나 준비된다. 레드 2종과 화이트 2종. 화이트 와인 중 하나는 스위트 와인, 하나는 일반 와인이라 다양한 맛을 음미할 수 있다.
한 켠에는 감자칩과 나초가 놓여 있다. 감자칩과 나초에는 맥주 아니냐고?
와인 애호가를 위한 각종 치즈와 견과류. 치즈가 전부 맛있어서 술을 자꾸 부르더라. (반대일지도 모른다.)
조식에 대해선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
사실 불길한 시그널은 여러 차례 있었다. 더글라스 하우스 홈페이지를 보면 굳이 조식을 ‘라이트 브렉퍼스트’라고 명시해 뒀다. 게다가 체크인 할 때는 직원이 ‘저희 조식이 정말 간단해요’라며 누차 강조하기도 했다.
메뉴가 얼마나 간단하냐 하면 지금도 조식 메뉴를 줄줄 읊을 수 있다. 그래놀라, 샐러드, 요거트, 청포도, 계란 요리, 햄, 빵 6종, 주스 2종이 전부다.
만일 간단한 조식이 싫다면 추가로 인당 26,000원을 내고 그랜드 워커힐 서울의 더뷔페에서 풀 뷔페를 즐길 수 있다. 더뷔페의 조식 가격이 56,000원이니 50%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셈이다.
조식에 대해 투숙객들의 불만이 잦았는지 체크인 할 때 직원이 연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더뷔페 조식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더글라스 조식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 오픈 키친이다. 계란 요리는 이 오픈 키친에서 셀프로 조리해 먹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귀찮게, 누군가에게는 즐겁게 읽힐 수 있는 부분일 테다.
심지어 한 외국인은 이 셀프 쿠킹 스테이션을 보고는 고개를 연신 저으며 ‘태어나서 한 번도 요리해본 적이 없다’며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 그러다 인덕션 위에 팬도 없이 계란을 통째로 올리기도 했다. 나는 그가 달걀 부화 실험을 하나 싶었다.
우여곡절 끝에 가져온 조식. 거의 이게 전부나 다름없다.
사실 나는 10년 전쯤 더글라스 하우스에서 묵어 본 적 있다. 너무 오래돼서 기억조차 흐릿한 그 때를 되짚어 보면 건물에 들어가자 마자 보이던 주황색 벽과 약간 낡은 듯한 객실만이 떠오른다. 10여년 전의 더글라스를 전부 기억하진 못하지만 그때의 더글라스와 지금의 더글라스는 완전히 다르다는 건 들어서는 순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휴식이 필요하지만 멀리 갈 시간 여유는 없을 때, 더글라스 하우스는 완벽한 해답이다. 삶의 쉼표가 필요할 때 멀지 않은 곳에 나를 위한 일일 별장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사람은 이름 따라 산다고 하던가. 건물 역시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건물의 이름처럼, 오래된 이 호텔은 몸소 보여준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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