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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과 상상 Apr 25. 2020

트롯 여왕의 추억

미스터 트롯 열풍에 즈음하여

질질 끌며 애태우는 경연 프로는 성질 급한 나에겐 애당초 맞지 않았다. 양가 어머니들의 환호를 보면서도 그게 '그렇게 재밌나?' 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듣게 된 임영웅의 '일편단심 민들레야'는 충격이었다. 흥이 많은 부모님 덕에 트로트는 익숙했지만 그저 어른들이 부르는 뽕짝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에 트롯 장르 자체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가수가 부르니 완전히 달랐다. 어느 퇴근길, 막히고 긴 그 거리를 이 노래만 듣고 운전한 적도 있었으니...



'님 주신 밤에 씨 뿌렸네. 사랑의 물로 꽃을 피웠네.' 

"뭐야? 이거 넘 야하잖아. 트로트 가사 파격적이군.'


한국 근대소설이 떠오르는 건 무엇이었을까?

청소년 시기에 한국 근대 소설을 많이 읽었고 그저 수능에 나온다 하니 마구잡이로 보았다. 그런데 큰딸이 이런 책들을 읽을 시기가 왔고, 함께 얘기 나눌 수 있으려면 한 번 더 읽어 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미 이렇게 성적이 묘사가 많았나?'


본능에 충실하며 여러 자료를 찾아보니 문학 속 성을 다룬 논문들이 많았다. 트로트의 태생 시기도 일제 강점기였으니 시대가 그리 멀지 않은 두 장르 -한국 근대 문학과 트로트- 에 비슷한 감정과 표현을 담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그리 틀릴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망국의 설움을 달래고 국민들의 한을 어루만지던 트로트가 먹고살기 힘들지도 않은 요즘 왜 이렇게 붐일까? 


신식만 추구하던 내가 이 프로그램에 빠져 있으면 가족들은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날 쳐다봤다. 남편의 눈빛은 '너도 이제 아줌마 다 됐구나.'라는 것이 분명했다. 처음엔 그 시선이 민망해서 괜히 이어폰을 찾기도 했지만 나의 적극적인 홍보 끝에 순위 발표 때는 전 가족이 함께 지켜보며 환호했던 기억이 난다.



"와~이거 트로트 맞냐?"

"엄마 저 가수는 슈스케 나가도 되겠는데요?"

"다들 잘 생기고 춤도 잘 추고...짱이긴 하네."

"찐찐찐찐찐이야~~♪♪♪."


가족들의 이런 반응을 이끌어 낸 나의 쾌거를 뿌듯해하며 지켜본 결승전.


           까똑~


       정원이었다. 


"이찬원 18세 순이 부르는 거 보니 니 생각난다."


순간 나는 여고시절도 돌아갔다. 어쩜 그렇게도 공부가 싫었던지 수업 시간에 공부 안 할 방법만 연구하던 때였다. 그러다 앞에 나와서 누가 노래하면 수업 안 하겠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나가서 노래를 했었다. 부끄러움보다 수업을 안 해야겠다는 의지가 더 강했고, 내 이름을 불러 대는 친구들의 애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누군가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애원했고 센 친구들은 이를 꽉 깨물며 복화술로 나가라는 경고를 날렸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간 데뷔 무대가 폭발적 반응을 가져왔고 그 이후 우린 매우 자주 노래를 부르며 수업을 제쳤다.


"앙~~~~~~~~~~~~~."


"아 왜? 또!."


"힘드러요~~~~~~~~~~~옹."


"뭐가?"


"공부요. 아앙~~~~~~~~~."


"어쩌라고?"


"이미영! 이미영! 이미영!~~~~~~."


다짜고짜 노래를 할 만한 친구들의 이름을 외쳤다. 그리고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피식 웃으며 쇼타임을 허락해 주셨다. 국어를 가르치셨던 총각 선생님들은 우리가 저럴 때마다 얼굴이 빨개지시며 칠판으로 고개를 돌리곤 하셨지. 참 짓궂었던 우리 여고시절.


그때 고2 담임 선생님 애창곡이 '18세 순이'였다. 그 노래가 뭔지도 몰랐던 나는 집에 전화를 해서 다짜고짜 18세 순이 어떻게 부르냐고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내가 그 노래를 어떻게 외웠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그 노래는 여고시절 나의 히트곡(?) 임은 틀림없었다.



'내가 트로트를 좋아했었구나?'


설거지를 하며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는데 철없던 여고시절의 추억이 스쳐 괜히 뭉클해진다. 돌아갈 수 없는 나의 여고 시절,  치기 어린 우리들의 장난을 웃으며 받아주시던 선생님들이 보고 싶어 코끝이 싸해진다.


18세 순이만 부르면 무서운 얼굴을 환히 폈던 고2 담임 선생님

참 많이 심했던 나의 장난을 품어 주셨던 고3 담임 선생님, 

그분 생각에 야자를 다 날려먹었던 첫사랑 총각 선생님,

장난을 참 심하게 쳐서 지금도 생각하면 참회(?)하게 되는 친구들,


잊고 산 기억인데 트롯 프로그램 덕분에 추억 속에 흠뻑 빠진 시간이었다.


애절하지만 구태의연하고 신나지만 촌스러웠던 트로트가 시대가 변하면서 세련되고 전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장르로 변화했다. 방송사와 음악 전문가들의 합작으로 가수들의 트레이닝이나 무대까지 전문화되면서 더욱 공감을 얻게 되었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나를 기쁘게 해 준 것처럼 세대를 넘나드는 장르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k pop에 열광하듯이 k trot에 전 세계가 화답하는 날이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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