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트롯 열풍에 즈음하여
질질 끌며 애태우는 경연 프로는 성질 급한 나에겐 애당초 맞지 않았다. 양가 어머니들의 환호를 보면서도 그게 '그렇게 재밌나?' 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듣게 된 임영웅의 '일편단심 민들레야'는 충격이었다. 흥이 많은 부모님 덕에 트로트는 익숙했지만 그저 어른들이 부르는 뽕짝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에 트롯 장르 자체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가수가 부르니 완전히 달랐다. 어느 퇴근길, 막히고 긴 그 거리를 이 노래만 듣고 운전한 적도 있었으니...
'님 주신 밤에 씨 뿌렸네. 사랑의 물로 꽃을 피웠네.'
"뭐야? 이거 넘 야하잖아. 트로트 가사 파격적이군.'
한국 근대소설이 떠오르는 건 무엇이었을까?
청소년 시기에 한국 근대 소설을 많이 읽었고 그저 수능에 나온다 하니 마구잡이로 보았다. 그런데 큰딸이 이런 책들을 읽을 시기가 왔고, 함께 얘기 나눌 수 있으려면 한 번 더 읽어 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미 이렇게 성적이 묘사가 많았나?'
본능에 충실하며 여러 자료를 찾아보니 문학 속 성을 다룬 논문들이 많았다. 트로트의 태생 시기도 일제 강점기였으니 시대가 그리 멀지 않은 두 장르 -한국 근대 문학과 트로트- 에 비슷한 감정과 표현을 담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그리 틀릴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망국의 설움을 달래고 국민들의 한을 어루만지던 트로트가 먹고살기 힘들지도 않은 요즘 왜 이렇게 붐일까?
신식만 추구하던 내가 이 프로그램에 빠져 있으면 가족들은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날 쳐다봤다. 남편의 눈빛은 '너도 이제 아줌마 다 됐구나.'라는 것이 분명했다. 처음엔 그 시선이 민망해서 괜히 이어폰을 찾기도 했지만 나의 적극적인 홍보 끝에 순위 발표 때는 전 가족이 함께 지켜보며 환호했던 기억이 난다.
"와~이거 트로트 맞냐?"
"엄마 저 가수는 슈스케 나가도 되겠는데요?"
"다들 잘 생기고 춤도 잘 추고...짱이긴 하네."
"찐찐찐찐찐이야~~♪♪♪."
가족들의 이런 반응을 이끌어 낸 나의 쾌거를 뿌듯해하며 지켜본 결승전.
까똑~
정원이었다.
"이찬원 18세 순이 부르는 거 보니 니 생각난다."
순간 나는 여고시절도 돌아갔다. 어쩜 그렇게도 공부가 싫었던지 수업 시간에 공부 안 할 방법만 연구하던 때였다. 그러다 앞에 나와서 누가 노래하면 수업 안 하겠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나가서 노래를 했었다. 부끄러움보다 수업을 안 해야겠다는 의지가 더 강했고, 내 이름을 불러 대는 친구들의 애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누군가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애원했고 센 친구들은 이를 꽉 깨물며 복화술로 나가라는 경고를 날렸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간 데뷔 무대가 폭발적 반응을 가져왔고 그 이후 우린 매우 자주 노래를 부르며 수업을 제쳤다.
"앙~~~~~~~~~~~~~."
"아 왜? 또!."
"힘드러요~~~~~~~~~~~옹."
"뭐가?"
"공부요. 아앙~~~~~~~~~."
"어쩌라고?"
"이미영! 이미영! 이미영!~~~~~~."
다짜고짜 노래를 할 만한 친구들의 이름을 외쳤다. 그리고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피식 웃으며 쇼타임을 허락해 주셨다. 국어를 가르치셨던 총각 선생님들은 우리가 저럴 때마다 얼굴이 빨개지시며 칠판으로 고개를 돌리곤 하셨지. 참 짓궂었던 우리 여고시절.
그때 고2 담임 선생님 애창곡이 '18세 순이'였다. 그 노래가 뭔지도 몰랐던 나는 집에 전화를 해서 다짜고짜 18세 순이 어떻게 부르냐고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내가 그 노래를 어떻게 외웠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그 노래는 여고시절 나의 히트곡(?) 임은 틀림없었다.
'내가 트로트를 좋아했었구나?'
설거지를 하며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는데 철없던 여고시절의 추억이 스쳐 괜히 뭉클해진다. 돌아갈 수 없는 나의 여고 시절, 치기 어린 우리들의 장난을 웃으며 받아주시던 선생님들이 보고 싶어 코끝이 싸해진다.
18세 순이만 부르면 무서운 얼굴을 환히 폈던 고2 담임 선생님
참 많이 심했던 나의 장난을 품어 주셨던 고3 담임 선생님,
그분 생각에 야자를 다 날려먹었던 첫사랑 총각 선생님,
장난을 참 심하게 쳐서 지금도 생각하면 참회(?)하게 되는 친구들,
잊고 산 기억인데 트롯 프로그램 덕분에 추억 속에 흠뻑 빠진 시간이었다.
애절하지만 구태의연하고 신나지만 촌스러웠던 트로트가 시대가 변하면서 세련되고 전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장르로 변화했다. 방송사와 음악 전문가들의 합작으로 가수들의 트레이닝이나 무대까지 전문화되면서 더욱 공감을 얻게 되었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나를 기쁘게 해 준 것처럼 세대를 넘나드는 장르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k pop에 열광하듯이 k trot에 전 세계가 화답하는 날이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