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억과 상상 Apr 25. 2020

Pro Memoria

[일상] 낙원은 일상 속에 있든지 아니면 없다.

나에겐 한 살 아래 여동생이 있다. 어릴 때 육탄전을 할 때면 그녀는 항상 나의 과거 과오를 꺼내 공격하곤 했다. 힘으로는 감히 나에게 대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세상 해맑은, 때론 억울한 표정으로 모르쇠를 고수했다.


  "내가?  내가 언제? 기억 안 나는데?"


  여동생은 환장하겠다는 표정으로 길길이 날뛰었지만 나는 진짜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남편과 결혼 날짜를 잡고 몸보신 차원에서 한의원에 간 적이 있다. 당시 최신 설비를 갖춘 신식 한의원을 표방한 그곳에서 나는 이런저런 검사를 했다. 건강에 대한 자신이 있었기에 결과를 듣는 자리에서도 당당했는데 그때 한의사 선생님의 당혹스러운 표정과 말씀을 기억력 나쁜 내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하.... 뇌파가 치매 노인의 뇌파와 비슷한데요? 기억력이 어떠신지요?"


  순간 당황했지만 그제야 26년간의 비밀이 풀리는 듯했다. 여동생이 길길이 뛰며 언니가 그랬지 않냐고 했을 때에도 난 모른 척한 게 아니라 진짜 기억이 안 나는 것이었고, '안면인식 장애가 있나?', '나처럼 이름을 기억 못 하는 사람이 있을까?'라고 고민하던 것도 이유가 있어서였다.


  남편은 나중에 늙어서 치매 오면 개목걸이 딱 하고 자기만 따라다니라며 이런저런 농담으로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는데 정작 내게 안 좋은 기억력은 큰 고민은 아니었다. 오히려 슬픈 기억, 나쁜 기억도 같이 사라지니 소위 '내 쪼대로'살기 편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첫째 아이를 낳고 치매 기억력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소중한 아이를 낳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종교도 없는 내가 신에게 감사를 드렸고, 열심히 잘 키우겠노라 눈물로 다짐도 했다. 그리고 웃고 웃고 먹고 싸는 단순한 행동 하나하나가 경이롭게 다가왔다.


  '이 예쁜 순간을 내가 잊어버리면 어쩌지?'

  '아이가 커서 해 줄 얘기가 없으면 어쩌지?'


  처음으로 느낀 두려움이었고 나는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글을 물론이거니와 사진에도 집착했다. 친정엄마는 어릴 때 사진이 없어서 한풀이한다고 그렇게 찍어대냐 했지만, 글도 사진도 나에겐 잊고 싶지 않은 역사의 기록이었다. 


  '낙원은 일상 속에 있든지 없다'


내가 좋아하는 문구이다. 마흔 증후군을 혹독하게 앓은 후 내가 깨달은 것도 일상의 낙원이었다. 나보다 잘 살고 잘난 사람은 왜 그렇게 많은지, 나는 왜 이렇게 작아 보이는지 고민했고 그게 나의 콤플렉스가 되어 자존감이 바닥을 친 적도 있었다. 엄친아, 엄친딸이라는 말처럼 남의 자식들은 다 잘하는 것 같고 남의 남편은 다 자상하면서도 돈도 잘 버는 능력자였다. 내가 학창 시절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지금의 나보다는 나은 삶을 살았을 거라며 자책했고 강압으로나마 그 길로 인도해주지 못했던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내 삶을 돌아보았고 내가 살아갈 날을 고민해보았다. 처절하게 책에 매달렸고 글쓰기에 집착도 해 봤다. 남편은 태어났으니 사는 거고 셋을 낳았으니 키워야 하지 않냐며 그놈의 책 좀 그만 보라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나를 산산이 분해하고 다시 조립했던 그 '마흔 앓이'의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일상의 행복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도 남과 비교하며 나로 온전히 살지 못했을 것이다.


  일상의 행복을 깨닫는 데에는 그동안의 기록들이 큰 역할을 했다. 나는 순간순간 행복을 느끼며 살았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그렇게 펴낸 삼 남매 육아 일기와 포토 에세이가 십여 권이 넘고 아이들과 주고받은 교환 일기도 몇 권이 된다.  스마트 폰으로 게임도 뭐도 안 하지만 사진과 동영상 만으로도 용량이 차고 넘친다. 우리 집만큼 앨범이 많은 집이 또 있을까?


  아이들은 가끔 책장에서 엄마의 육아일기를 들춰본다. 힘들고 지친 날에는 어김없이 육아일기가 책상 위에 펼쳐져 있다. 공부하기 싫을 때도 엄마와 주고받은 교환일기를 보면 힘이 난다고 한다. 그저 소중한 그 순간을 잊어버릴까 두려워서 쓴 기록들이 이젠 나와 내 아이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기록 속에 있는 글과 사진을 이야깃거리 삼아 끝없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물론 수없이 했던 똑같은 얘기들이지만...


  일상의 낙원을 누리기 위해 나는 오늘도 이렇게 기록을 한다. 무너지고 좌절할 때마다 이런 기록들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리란 것을 알기 때문에...

  

  

  

  

작가의 이전글 앗! 속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