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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이유지 Mar 11. 2024

우리 저 할머니 태워드리자

퇴근 후 6세 반 형아가 된 우리의 어린이와 함께 시내로 향했다. 볼일을 마치고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려는데 곤히 잠든 아이. 자다가 일어나서 짜증을 내고 생떼를 부릴 때가 많아 내심 불안했는데 역시 오늘도 조용히 지나가지 않는다. 아이가 좋아하는 마트에 가는 길에 잠깐 빵집에 들르려 하는데 빵집은 안된다고 울기 시작한다. 소리치고 발차기를 시작하길래 그러면 네가 원하는 마트에도 가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하며 집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엄마 아빠는 마트에 가기로 한 것을 잊은 거냐며 울음을 멈추지 않는 아이.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저녁 평화로운 외출을 기대했는데 정말 지치는 순간이다. 정말 집으로 가면 모두의 기분이 안 좋아질 것이다. 아이를 진정시키며 상한 마음도 달래고 다시 한번 차를 돌려 마트로 갔다. 본인도 미안했는지 아이는 괜히 더 말을 많이 하며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얌전히 쇼핑을 했다.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보여주는 녀석 덕분에 요즘 우리 가족은 모두 감정을 조절하는 연습 중이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 멈추지 않는 비 때문에 차선도 잘 보이지 않는 귀갓길이 차갑고 어둡기만 하다. 이런 날은 빨리 이불속으로 들어가는 게 상책인데. 평화를 되찾은 차 안은 우리 세 가족의 고요한 시간만이 흐르고 있었다. 목적지가 2km 남짓 언덕길을 지나는데 운전대를 잡은 남편이 놀라 소리친다. “아우 깜짝이야. 뭐야 할머니가 저기 왜 서있어? 너무 위험한데? 태워드릴까?” , ”집 앞이겠지. 차에 지금 앉을 데도 없는데..” , “그냥 갈까? 아니 저기 민가도 없는데 왜 저기 계신 거야” 심신이 지쳐있던 터라 외면할까 잠깐 망설였지만 우린 말하지 않아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 그냥 가면 그게 더 신경 쓰이겠지? 동물들도 도와주는데 사람도 당연히 도와야지. 차 돌리자” 우린 바로 다음 신호에 유턴을 해서 할머니가 계신 곳으로 향했다. 차가 도착하기 전에 어딘가로 사라지시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그 자리에 계셨다. 여전히 위험한 찻길에. 


차를 세우고 비상등을 켰다. 

“할머니, 비도 오는데 왜 여기 이러고 계세요. 댁이 어디세요?” , “집? 00.” 댁이 근처겠거니 했는데 생각보다 집이 멀다.  “일단 타세요. 여기 너무 위험한데 왜 이런데 계셨어요?” 가까이서 보니 80은 훌쩍 넘어 보이는 고령의 노인이었다. 비 오는 날 밖에서 한참을 계셨는지 자동차에 오르려 잠깐 지팡이를 들어 올리는 짧은 순간에도 넘어질 듯 몸이 뒤로 휘청했다. 얼른 잡아서 앉혀 드리고 차문을 닫았다. 차가 워낙 빠르게 달리는 언덕의 내리막이 시작되는 지점이라 움직이지 않으면 모두가 위험한 곳. 


“할머니 어쩌다가 거기 서계셨던 거예요?”

“택시를 잡으려고 하는데 차가 안 잡혔어”

“아이고 큰일 날 뻔하셨어요.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세요?”

“응 근처에”

“할머니 그 동네 어디세요? 주소 알고 계세요?”

”주소는 몰라. 00 3리야”

“집으로 가는 버스 혹시 있으세요?” 


버스가 있는지 여쭸지만 버스를 태워 보내드릴 상태가 아니어서 멈추지 않고 우리 집을 지나쳐서 할머니의 동네로 향했다. 집이 바닷가 근처인지 중산간 쪽인지 근처에 뭐가 있는지 물었지만 주소를 모르시니 막막하기만 하다. 미안하신지 근처 오일장에 세워주면 알아서 가겠다고 하시는데 비도 내리는 어두운 밤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질문을 이어갔고 동네 리사무소로 주소를 찍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셨는지 옆자리에 앉은 아이를 보며 질문하신다.


“아이는 요거 하나야? 더 낳아 키워야지”

“아이고 하나도 힘들어서 더는 못 키우겠어요”

“힘들어도 자식은 어디 안 가” 할머니의 경험이 담긴 묵직한 한 마디다.

“할머니는 자녀분이 어떻게 되세요?”

“아들 둘, 딸 둘. 손주들도 있어”

“우와 고생 많으셨을 텐데 지금은 좋으시겠어요. 다 키운 딸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좋지. 아들은 제사 지내주니 좋고 딸들은 마음 써줘서 좋아. 사실 아들들은 딸만큼 못해. 마음은 딸들이 더 좋아”

“댁에 가시면 가족들도 있으세요?”

“응 큰아들네랑 같이 살아.”

“아드님 전화번호 아세요? 번호 좀 알려주세요”

“전화번호는 아는데 전화하면 안 돼. 아들한테 혼나 이렇게 다니면”

“그래도 연락드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할머니 핸드폰은 가지고 계세요?”

“아니야 혼나 안돼. 핸드폰도 없어 허허”


극구 사양하시는데 강요할 수 없어 일단 가보기로 했다. 앉아계시던 할머니가 주머니에서 쌈짓돈을 꺼내 한 장 한 장 살피며 아이에게 천 원짜리 세 장을 건네신다. 제주도 어르신들은 아이들을 보면 돈을 건네기도 하고 내내 미안해하는 그 마음을 알기에 아이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받으라고 말했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많이 못줘서 미안해”


목적지가 가까워지는데 길이 어두워서 그런지 할머니가 어딘지 잘 모르시겠다고 하셨다. 평생을 살아온 동네 일 텐데 밤길이라 그렇거니 했다. 다행히 건물 앞에 서니 자주 오는 곳이라 여기서부터는 걸어가겠다고 하신다. 가까워도 집 앞까지 모셔다 드리고 싶었지만 역정을 내며 얼른 가라고 하시길래 인사하고 돌아섰다. 


“아.. 불안한데.. 라이트 일단 끄고 잘 들어가시는지 보고 가자.” 


파파라치 라도 된 듯 차를 천천히 움직이며 멀리서 지켜보는데 할머니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매고 계신다. 일단 지켜보기로 하고 천천히 할머니 뒤를 밟았다. 근처 정류장에 앉아 계시더니 또다시 일어나 여기저기 어두운 골목을 헤매는 것 같아서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다. 상황을 설명하고 차 안에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 와달라고 하고 통화를 마쳤다. 잠시 후 다시 걸려온 전화. 


“실종신고된 할머니 같아요. 치매 노인입니다. 000 할머니입니다.”


어둠 속에서 길을 헤매고 계신 할머니에게 다가가 창문을 내리고 성함을 여쭸다. 

“000 할머니 맞으세요?”

“어? 어떻게 알았어? 맞아”

“아이고 할머니 가족분들이 찾고 계셨대요. 지금 찾으러 온다니까 아까 계셨던 요 앞 정류장에 앉아 계세요. 금방 찾으러 오신대요.”


전화를 끊고 할머니가 계신 정류장 앞에 주차 후 3분 정도 지나니 경찰차 3대가 도착했다. 우르르 경찰들이 내리고 나와 함께 차 안에 있던 아이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모두들 실종신고된 할머니를 찾느라 고생했는지 할머니를 둘러싸고 안도의 표정이다. 한창 경찰차와 소방차에 관심이 많은 아이에게 밖에 있는 아빠에게 나가서 함께 있어도 좋다고 말하고 차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우리 차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계시던 수사 팀장님에게 대뜸 소리친다. 


“으악. 누가 여기에서 담배를 피우는 거예요? 으악 담배냄새에~” 

“감히 수사 팀장님한테 담배 피운다고 잔소리하는 사람 네가 처음이다.” 

“하하하하” 


제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경찰이 아닌 것으로 여기는 아이의 천진함 덕분에 모두가 웃으며 상황은 마무리됐다. 


뿌듯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의 잠투정이 없었다면 할머니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우리 00 이가 할머니를 구해준 거라며 아이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날 마트에 다녀올 수 있을 정도로 일이 일찍 마무리된 것도, 아이의 잠투정과 실랑이도, 그 시간에 그 길을 지나온 것도 모두 할머니를 위함이었다는 사실은 추적추적 비 내리는 늦은 밤 우리 가족에게 안도감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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