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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oo Jun 02. 2023

보고 싶은 우리 엄마!

내 인생의 멘토이자 가장 존경하고 닮고 싶은 사람

가족소개에서 부모님은 보통 엄한 아버지와 인자한 어머니로 표현된다. 그러나 우리 집의 경우에는 엄하지만 인자한 엄마와 착한 아빠로 소개된다. 엄마는 결혼하면 똑똑하고 예쁜 자식을 낳고 싶었다고 했다. 그것이 인물 좋고 지역에서 수재로 소문난 아빠와 결혼한 이유였다고 했다. 


스물셋이라는 나이에 자녀에 대해 생각할 정도로 엄마는 속이 꽉 찬 사람이었다. 경찰이었던 아빠와의 결혼으로 엄마는 자식에 대한 목표를 이뤘다며 우리 남매 자랑을 달고 사셨다.  엄마의 자랑이지만 그리 현명하지도 남들처럼 일찍 철들지도 못한 나는 지금부터 보고 싶은 우리 엄마 얘기를 하려고 한다.




우리 엄마는 7남매 중 넷째 딸로 해방을 한 해 앞둔 봄날 경기도에서 태어났다. 위로 3명의 언니가 있었던 탓에 아들을 바라는 부모님의 기원을 담아 ‘원균’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어쩌면 엄마가 그토록 짧지만 굵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 것은 그 강한 이름 때문이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엄마의 이름 덕분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어쨌든 엄마는 3명의 남동생을 줄줄이 봤다. 그러나 몇 년 후에 닥친 전쟁의 피난길에서 홍역으로 바로 아래 2명의 남동생을 먼저 보내야 했다. 열 살도 안된 어린 나이에도 먼저 간 동생들이 눈에 밟혀 날마다 피난지였던 충청도 어디쯤에 있는 동생무덤을 찾았다고 한다.




엄마는 타고난 총기와 할머니의 치맛바람으로 승승장구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여자사범고등학교에 다니고 싶었지만, 계집애는 많이 배우면 인생이 피곤해진다는 할아버지의 소신에 의해 집으로 끌려오면서 엄마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어느 날 우연히 우리 동네로 이사 온 엄마의 사범고등학교 입학동기생을 만나서 알게 된 것이다. 


부모님 학력 난에 엄마는 중졸이라고 표시했고 한 번도 얘기해 준 적이 없기에 고등학교 진학 일은 그때까지 알지 못했다. 언젠가 따라갔던 엄마의 중학교 동창회에서 어느 선생님이 엄마의 이름을 부르며 “ 네가 그때 공부를 끝까지 마쳤으면 여걸이 됐을 텐데.”라고 했던 말씀이 생각났다. “그땐 외할아버지를 거슬릴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라며 엄마는 살면서 회한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그날 나는 엄마가 더 이상 우리 남매에게 시간을 쏟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면 엄마를 다시 공부할 수 있게 해서 멋진 대학생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후에도 엄마에게 뭔가를 해주겠다는 지키지도 못한 많은 약속들을 했다. 그 약속들이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서도 여전히 나는 엄마와는 주말에도 밥 한 끼 제대로 못할 만큼 밖에서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엄마를 대학교에 보내준다는 약속은 지키지 않았다. 엄마는 몇 번이나 언제부터 공부를 다시 할 수 있을까라고 물으셨지만 그때마다 나는 뭐 하러 그렇게 힘들게 살려고 하냐며 외할아버지 코스프레를 했다.




기다림에 지친 엄마는 어느 날 자신의 특기를 살려서 내가 다니는 직장 옆 광화문빌딩가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일 때문에 1시간 정도 일찍 출근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엄마와 같이 공원 벤치에서 자판기 커피 한 잔 하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오후 6시면 칼 퇴근을 하던 나는 근처 카페에서 친구들을 만나서 놀며 엄마가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기다렸다. 이때의 나의 행동은 생각하면 할수록 한심하고 안타깝다. 그때 엄마에게 힘이 되어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니 그래야 하지 않았을까? 


엄마가 밤낮없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우리는 편히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은 우리에게 안락함과 더불어 한 가지 큰 고통을 안겨 주었다. 우리에게 철인 같았던 존재인 엄마를 단숨에 쓰러뜨린 유방암이다. 병원에서 병명을 알게 된 날부터 우리 가족은 지옥을 살았다. 


엄마는 유난히 무덤덤한 우리 가족을 웃게 하는 존재였고 우리를 튼튼히 받쳐 주는 중심이었다. 다행히 병원에 수술을 빨리 하게 되었고 예후도 좋아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 집은 일상을 회복해 갔다.




그렇게 5년이 지날 무렵 나는 돌연되지도 않는 공부를 하겠다며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갔다. 남들이 다 아깝다고 말리던 직장을 그만 둘 때도, 유학수속을 밟을 때도 엄마는 웃으며 “잘했다”라고만 했다. 그 말이 진심이라고만 생각한 나는 딸 바보 엄마 곁을 훌쩍 떠나서 3년을 보내고 다시 돌아왔다. 남편도 아들도 대신 못할 만큼 딸을 사랑했던 엄마는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산을 위로 삼았다고 한다. 


내가 돌아오고 1년 후에 엄마의 병이 재발했다. 다시 병원신세를 져야 했지만 곧 좋아져서 기력을 회복한 엄마는 나와 당시 복학해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던 남동생을 결혼시켜야 한다며 가족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두 해에 걸쳐서 속전속결로 우리 남매를 결혼시키고 3명의 손주를 봤다. 


그리고 내 딸아이가 4살이 되던 봄날에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우리들 곁을 영원히 떠났다. 봄날 세상에 왔다가 봄날 세상을 떠난 울 엄마는 꽃중년이었다.

   



대학을 지원할 때 엄마는 내 적성에도 맞고 전망도 있고 여자 직업으로 참 좋은 것 같다며 도서관학을 전공해서 사서가 되면 좋겠다고 했다. 엄마의 조언대로 나는 도서관학과를 갔고 지금도 사서로서 일을 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사서로서 나의 이야기를 담은 책도 나왔다. 


'원균 씨'는 내 인생의 멘토이자 내가 가장 존경하고 닮고 싶은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 엄마다.


지겹게 말 안 듣던 청개구리가 부모님 마지막 소원은 들어 드리겠다며 물가에 무덤을 만들고 비만 오면 개골개골 사모곡을 부르는 것처럼 나는 지금 내 딸을 키우면서 내 일을 하면서 가슴으로 사모곡을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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