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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oo Jun 20. 2023

은주 할머니가 된 외할머니 이야기

내게 따뜻한 세상을 안겨 준 고마운 존재         

하하히(河夏姬). 우리 외할머니 이름이다. 하(河씨) 집안에서 여름에 태어난 외할머니는 그렇게 여름 계집아이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나는 우리 외할머니와 같은 이름을 본 적이 없다. 


외할머니는 당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을까? 한 번도 묻지 않아서 외할머니 생각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늘 쪽진 머리에 한복 저고리와 긴 양식 치마를 입고 있는 외할머니에게 무척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내 기억 속에 외할머니는 긴 자주색 치마와 흰 저고리에 파란색 조끼를 걸치고 앉아서 소주 한잔 기울이던 모습으로 남았다. 엄마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내가 따뜻한 정을 느꼈던 사람이 외할머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게 죽음의 실체를 알게 한 사람이기도 하다.  




엄격한 도덕적 잣대와 불같은 성정을 지닌 외할머니는 자식은 물론 손자와 손녀에게도 어렵고 무서운 사람으로 통했다. 예외는 어디에나 있듯이, 외할머니는 나와 우리 가족에게는 싫은 소리 한 번을 하지 않으셨다. 그런 외할머니를 사촌 형제들은 항상 ‘은주네 할머니’라고 불렀다. 


그러면 외할머니는 말 같지도 않은 어리석은 소리를 한다고 일축해 버리셨다. 외할머니는 답답하다며 자식들과 떨어져 혼자 지내셨다. 서울 근교에서 사시던 외할머니 집 근처에는 커다란 강이 있었다. 대학생이 되어 MT를 가면서 알게 된 그곳은 당시 MT의 성지였던 강촌이었다. 


여름 방학 때마다 우리 가족은 이모들과 사촌들과 함께 외할머니를 뵈러 갔다. 2박 3일 정도 외할머니 집에 머무는 동안 매일 그 강가에서 수영도 하고 밥도 해 먹고 놀았다. 그때에도 외할머니는 고등학생인 나를 제쳐두고 중학생인 사촌 여동생에게 온갖 심부름을 다 시켜서 원망을 들었다. 


왜 자기만 시키느냐고 따지듯 묻는 여동생에게 외할머니는 “언니는 공부하느라 힘드니까, 공부하기 싫고 놀기 좋아하는 네게 시키는 거”라고 말했다. 그날부터 외할머니는 ‘은주네 할머니’에서 ‘은주 할머니’가 되었다.




은주 할머니, 하하희씨가 내게 준 것이 하나 더 있다. 갓 구운 식빵이었다. 지금은 기업에서 하는 빵집도 개인 빵집도 많지만, 그때는 동네에 빵집 하나 있는 정도였다. 게다가 빵은 밥 대용이었지 간식이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빵순이였던 나는 빵이 너무 먹고 싶어서 다이어트를 한다는 핑계로 밥을 굶었다. 


그러면 밥 대신에 좋아하는 빵 한 개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두절미하고, 초등학교 몇 학년인지는 생각나지 않는 어느 날 집에 가보니 외할머니가 와 계셨다. 부엌으로 나를 데려간 외할머니는 종이에 싸인 뭔가를 내게 주었다. 폭신폭신하고 따뜻한 식빵이었다. 


외할머니 친구분이 함께 어디 좀 가보자고 해서 갔더니 간식으로 식빵을 줬다며, “빵을 보니 네 생각이 나서 가져왔지, 따뜻할 때 얼른 먹어봐”라고 하셨다. 너무 맛있다는 손녀의 말에 외할머니는 몇 번인가 더 그 식빵을 가지고 우리 집에 오셨다. 


외할머니가 빵순이 손녀의 식빵을 위해 한여름 뙤약볕에서 몇 시간씩 잡초를 뽑았다는 것을, 어느 날 엄마가 엄청 큰 목소리로 외할머니에게 하는 싫은 소리를 듣고 알게 되었다. 그날 외할머니가 가져다준 것이 마지막 식빵이 되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도 나는 그렇게 맛있는 식빵을 먹어 본 적이 없다. 




마르지 않는 샘물을 길어 올리는 것처럼, 외할머니가 내게 준 사랑과 소중한 추억은 무궁무진하다. 외할머니가 내게 준 사랑의 온기 덕분에 나는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외할머니가 내게 했던 말들 그 느낌들로 인해 어떤 순간에도 나 자신을 지켜내고 당당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다는 기억을 가진 사람 앞에서는 삶의 폭풍우도 그 어떤 멸시도 전혀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3남 4녀 가운데 아들 둘을 피난길에 잃고 4녀 1남의 자식을 둔 외할머니의 외로움과 슬픔. 그때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외할머니의 인생을 생각해 보게 되는 나이가 되니, 후회막급이다. 내게 따뜻한 세상을 안겨 준 고마운 존재, 하하히씨 사랑합니다.   


by 사서주페어's brunch [감사&은혜, 초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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