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사무실 내 옆자리 창가에 작은 화분이 하나 생겼다. 키우려고 맘 먹고 가져온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키우게 됐다. 걔는 잘 자라지 않는다. 벌써 한 달 정도가 됐는데 싹조차 올라오지 않는 걸 보면 아마도 걔에게는 더 이상 기대를 걸면 안 될 듯 하다. 창가의 햇빛이 너무 뜨거웠나 싶기도 하고, 영양제라도 꽂을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 화분에 물을 조금씩 준다. 이틀이나 사흘꼴로 한 번씩, 아마도 가망 없을 흙에 물을 조금씩 떨어뜨린다.
나는 원래 식물을 잘 살리는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기회가 제대로 없어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잘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다. 그치만 난 그런 부류의 사람은 아니라고 확신을 한 건 얼마 안 된 일이다. 내가 떠나보낸 화분만 몇 개였더라? 세어보다 머리를 긁적인다.
처음 이사를 하고 나서는 흙까지 채우면 족히 5kg는 될 토분에 아스파라거스를 심어왔다. 먹는 아스파라거스는 아니다. 돌에 박혀있어야 할 이끼가 줄기로 길게 자라난 것 같은 모양새의 식물이다. 이사를 하자마자 화분을 하나 들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사왔던 것이다. 십년이 넘도록 지내던 공간에서 떠나온 뒤 마주한 작은 공간은 한없이 낯설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연락을 했었다.
'화분 가게에 갈래?'
내가 고른 건 아주 예쁜 초록색이었다. 줄기가 굵지 않고 아주 미세해서 제 아무리 엽록소를 강하게 뽐내봤자, 멀리서 보면 옅은 ‘초록빛’에 불과한 그 색이 맘에 들었다. 나는 지극정성으로 흙에 물을 주고, 잎에도 물을 뿌리고 하면서 지켜봤다. 그러다가 몇 달이 지났다. 낯설던 공간은 익숙해지고, 나만의 것이 생겼다며 설레하던 마음은 금세 불평거리를 찾아내는 습관들에 자리를 뺏겼다. 그동안 아스파라거스의 가녀리던 초록빛은 노란색으로 조금씩 변했다. 강한 햇볕에 오래된 종이가 바싹 마른 것처럼. 나는 퇴근하고 와서는 그 색을 보고 한숨을 내쉬곤 했다. 체력이 남은 날에는 그 노랗게 변한 부분을 좀 잘라내주기도 했고, 그렇지 않은 날엔 그냥 놔두었다. 그러다가 어느 늦은 밤 돌아온 집 한 켠, 화분의 반절 이상이 누렇게 변해있었다. 꿈뻑꿈뻑 그 화분 앞에 앉아 그걸 들여다봤던 기억이 난다. 쪼그려앉은 나는 그 큰 화분과 몸통이 비슷하였으리라. 이끼에 단풍이 든 것처럼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나는 어느 휴일에 무거운 몸을 끌고 흙까지 통째로 들여내며 화분을 정리하느라 애를 좀 먹었다. '이럴 거면 이걸 왜 사가지고. 어휴.' 화분이 없어진 집은 예상보다 훨씬 덜 멋지지만, 나는 어느덧 그 밋밋함에 적응했다. 이제 내 공간에서 공식적인 초록은 없다. 그건 참 아쉽지만, 아쉬운대로 잘 살고 있다. 흙과 식물이 사라진 화분은 장식품처럼 여전히 한 켠에 남아있다.
그러고 보니 회사에 처음 입사하고 나서도, 화분 하나를 가져간 게 생각난다. 식물의 이름은 생각조차 나질 않는다. 내 사무실, 내 자리가 생겼단 사실에 나는 기뻤다. 책상 한 켠엔 내 이름이 작은 아크릴 명패에 끼워져 있었다. 몇 번이고 그 명패 사진을 찍곤 했다. 오고 가는 누구나 내 자리라는 걸 알 수 있는 증표. 종이 한 장만큼 얇지만, 또 아크릴 판이 앞뒤로 끼워져 있는 한 날아갈 일이 없는 것. 처음에 나는 그 자리에 적응을 잘 못 했던 것도 같다. 내 이름 석 자가 박힌 자리긴 하지만, 이 물건 저 물건 ‘내 것’을 쉽게 쌓아둘 수가 없었다. 파티션에 포스트잇 하나를 압정으로 붙이는 것도 망설이며 했다. 그러다가 손바닥만 한 통조림 같이 생긴 화분 하나를 가져온 것이다. 그걸 누구한테 받았었는지, 혹은 내가 직접 샀었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 심지어 잎사귀와 줄기의 모양조차도. 다만 창가 자리에 햇볕이 잘 들도록 그걸 가져다 두던 장면이 생각난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걸 들여다봤고, 제법 깜찍한 플라스틱 사슴 모형까지 사서 화분 언저리에 조심스레 놓아두었다.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게도, 새싹이 돋았다. 작은 화분이라지만 가까이 가면 흙냄새가 희미하게나마 올라왔다. 사무실은 자주 살얼음 판 같았지만 내가 화분에 물을 주러 갈 때는 모두들 그걸 같이 들여다보느라 복닥거렸다. 흙을 뚫고 새싹이 올라오는 건 긴장감 아니면 헛웃음이 감돌던 그때 사무실에서 작은 이슈였다. 모두가 소중하게 여길 수 있고 또 모두가 응원하는 작은 소동.
그 뒤로는, 글쎄.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함께 새싹이 올라오던 걸 보던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떠났다. 나는 자리에 뭔가를 쌓아두다 못해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지도 못 하는 사람이 됐다. 또 옅은 흙냄새를 맡을 새 없이 코피를 자주 흘리기도 했다. 사무실을 옮기며 그 화분이 어떻게 됐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신 그 후로 나는 꽤 오랜 시간을 생명력이 강한 식물처럼 잘, 버텼다. 그러는 동안 또 몇 개의 화분이 더 크지 못 하고 잎을 떨구었다. 대신에 나는 연차를 쌓고, 승진을 하며, 많은 것에 무덤덤해지며 자랐다.
내가 지금까지 뭔가를 틔우기로 작정했다가 실패한 흙이 얼마나 될지 생각한다. 몇 줌일 수도 있고, 어쩌면 삽으로 퍼내야 할 정도일 수도 있겠다. 몇 번의 식물 키우기를 실패하고 나는 더 이상 화분 같은 건 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다가도 꽃과 식물을 파는 가게에 가면 작은 토분들에 오래도록 눈길을 주다 겨우 정을 떼내고 나온다. '이거 키우기 힘들겠죠?' 화분을 안고 가게 문턱을 나설 수 없는 이유를 꼬치꼬치 찾아가며 매번 그걸 반복한다. 그리고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는 버스에서 ‘나는 흙에서 뭘 틔워내는 사람은 아냐’ 다짐하듯 다시 떠올린다. 나이 들어서 남들 따라 귀촌했다가는 굶고 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실패할 확률이 대단히 크다는 걸 알면서도 또 몇 개의 화분 앞에서 고민하는 나를 스스로 이상하게 여긴다. 그러다가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내 자리’를 만들고 싶어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 손으로 덮고 일구고 키우고 가끔은 여상한 생명의 색을 틔워내고 하는 과정을 보면, 그 일이 일어나는 자리가 온전히 내 자리라고 느낀다. 이 작은 화분을 가꾸는 동안, 여기는 나의 손길이 닫는 양지라는 걸 안다. 내가 틔워내는 장소라는 걸 흙냄새로, 분무기 사이로 퍼지는 물방울들로 알아챈다.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나는 여전히 화분에 내 마음을 틔워내려고 할지도 모른다. 많은 경우에 나는 그걸 실패하지만, 화분을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내 손길이 닿는 곳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순 있다. 지금까지 내 흙들은 식물을 무성히 키워내는 데는 젬병이었지만, 나를 어떤 장소에 뿌리 내리게 하는 데는 퍽 소질이 있던 것 같다.
한 번은 회사 점심시간 후에 이를 닦고 나서, 칫솔통을 다시 제자리에 놓으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제자리’라는 게 있다는 게 무척이나 신기하지 않나요? 누구에게 말했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뻔한 말을 나는 오후 내도록 속으로 묻고 답했다. 내 칫솔통, 내 가방, 내 생수병, 내 책을 놓을 내 자리가 있는 것이 어찌나 신기한 일인지. 무거운 나의 표식들을 이리저리 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게, 얼마나 이상하고도 마음 놓이는 일인지. 내 이름으로 된 책상이, 자리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에 나는 가끔 깜짝 놀란다. 어딘가 먼 곳에 갔다가 돌아와도 여전히 내 자리일 곳이 있다는 감각을 느끼려 난 이것저것을 가져다 놓는다. 내 자리이니까, 내 장소이니까. 그리고 끝내는 화분을 가져다 둔다. 얼마 못 가리라는 나의 예상과 주위 사람들의 잔소리가 적중할 것임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화분을 가져다 놓는다. 내 손이 닿는 내 자리이니까. 뭔가가 이 흙에서 자라나고 때론 사라지는 일도 모두 내 자리 안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감각을 다시금 느끼기 위해서.
나고 자라며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여러 장소를 거친다. 가끔은 집이 옮겨지고, 놀이터가 옮겨지고, 학교를 옮겨 다닌다. 직장이 옮겨지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추억의 장소가 옮겨진다. 하나에 적응하는 데 남들보다 긴 시간이 필요한 이들은 그 과정을 허겁지겁 쫓아다닌다. 먼저 가서 명당을 봐놓진 못 하고, 변하는 삶의 장소들을 쫓아가느라 마음이 급하다. 놓고 온 기억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옮겨야 하는 곳들이 기다린다. 밟고 서야 하는 흙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만들어가야 하는 날들.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언제 또 내 삶의 장소가 옮겨질까, 생각하다 보면 설레기 보다는 문득 걱정이 앞선다. 아무리 내 키가 커도 따라가야 하는 거리는 늘 나를 뱁새로 만들어 버리곤 한다.
그래도 거기에 내 작은 화분을 놓을만한 구석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왠지 모든 걸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장소가 내 맘보다 먼저 내 몸을 이끌고 가도, 잘 딛고 설 수 있을 것 같은 거다. 내 화분은 작고, 난 마음을 쓰며 그걸 돌볼 거고, 어쩌다 보면 내 화분에는 또 초록 대신 끝내 흙만 남을 수도 있을 걸 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게 내 자리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 화분에 제자리가 생기면, 내 마음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다. 나는 어디로 옮겨갈지 모르면서도 마냥 그런 생각을 한다. 어딜 가든 내 주먹만큼의 흙은 구할 수 있을테니까. 아주 가벼운 한 줌의 내 흙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떨어져있을지 모르는 다음의 장소를 안심한다.
어쩌면 다음 가을에는 새 화분을 하나 마련할 용기가 생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