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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rthwalker May 18. 2022

동화 같은 이야기들

얼마 전 아주 오랜만에 메일함을 정리했다. 용량이 꽉 찼다는 알람이 수시로 뜨는 게 몹시도 거슬렸기 때문이다. 들어가 본 메일함에는 ‘주고 받은’ 메일은 몇 없었다. 대강 가입했던 수십개의 사이트들에서 일방적으로 온 정기 레터(대개는 뭔가를 사라는 내용이었다)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여섯개 정도까지는 예의상 그 내용을 한 번씩 들여다본 후 지웠다. 하지만 곧내 가장 최신 메일부터 내가 내려갈 수 있는 한 가장 아래의 스크롤까지 내려 한번에 휴지통에 드래그했다. 턱을 괴고 아무 감흥 없는 표정으로 그 짓을 한참이나 했다. 메일은 많이도 쌓여 있었다. 100개, 200개… 마침내 메일함은 깨끗해졌다. 화요일에 피자를 포장해가면 반값이라는둥, 여름에 수영복 하나쯤은 갖춰야 한다는 둥, 이번 주말 발레 공연을 예약해두라는 둥(심지어 이건 외국에서 온 메일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 아니 기계가 보낸 메일은 모두 지워졌다.


텅 빈 메일함을 들여다보다가, ‘애정하는 편지’라고 따로 마련해둔 폴더가 보였다. 내가 저런 걸 언제 만들었나 싶었다. 들어가본 폴더에는, 거창한 이름과 달리 저장된 메일도 몇 개 없었다. 누군가와 내가 여러 번 주고 받은 메일이 타래처럼 쌓여 있길래 그 중 하나를 열어보았다. 한 켠에 쓰인 이름만으로는 얼굴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가만 생각해보니 대학 시절 교수님의 성함이었다. 그것도 딱 한 학기, 필수도 아니었던 교양 과목의 교수님이었다. 대학에 가자마자 첫 학기에 들었던 수업이었다. 그건 ‘환상 문학’이란 것에 대한 수업이었다. 스물의 나는 그 이름에 홀연히 이끌려 들어간 인문관의 아주 큰 강의실 안에서 체구가 작은 교수님을 한 학기 동안 뵈었다.


주고 받은 몇 개의 메일들은 스무살이던 나의 활기차고도 해맑기 그지 없는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클릭해 메일 내용을 보자마자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몇 줄 되지도 않는 메일에는 온갖 이모티콘이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줄마다 채워져 있었다. 스무살의 내가 보낸 메일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지금의 내가 받아본 것 같았다. 꼭 황당한 업무 메일을 받았을 때의 기분과도 비슷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0^ 저는 이번 학기에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인데요~! 질문이 하나 있어요~~~!^*^


텍스트 속 내 스무살이 남의 스무살 같았다. 일일 드라마에 나오는, 전형적인 여자 주인공의 철없는 동생 같은 말투였다. 별 인사도 격식 어린 말도 없이 다짜고짜 질문부터 하더니 온갖 하트고 웃는 얼굴이고 물결이고 남발을 하는 메일은 참, 명랑 그 자체였다.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별 영양가 있는 질문도 아니었으면서 이걸 보내고 ‘수업 열심히 들었다’며 뿌듯해 했을 내가 그려져서 나는 머리를 짚었다. 나름대로 스무살에는 고민 많고 비밀 많은 해를 보냈다며 늘 어딘가 아련한 회상을 해왔는데… 이런 메일을 보낼 수 있던 스무살이었다면 얘기는 좀 달라질 것 같다.


하여간에, 스무살 짜리의 애교남발 메일에 교수님은 감사하게도, 혹은 오히려 창피하게도 친절히 답을 해주셨다. 메일을 쓸 때는 이모티콘을 지우라거나 그런 질문은 수업 끝나고 나서 바로 하라거나 하는 말씀은 없었다. 아마 그래서 내가 그 메일들을 ‘애정하는 편지’ 폴더에 넣어놓지 않았나 싶다. 그런 식의 메일이 몇 번 오갔고, 교수님은 처음에 ‘학생’이라고 부르던 호칭을 학기말엔 내 이름 두 자로 바꾸셨다. 학기를 끝내면서 나는 손으로 편지를 써 체구가 작고 단발머리이시던 교수님께 전해드렸던 것도 같다.


그 수업은 호불호가 많이도 갈렸다. 그런데도 듣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많아서 (아이라고 해도 되겠지- 싶다. 스무살 짜리의 메일을 봤으니까.) 수강 신청에 성공하기가 어려웠다. 내 기억력은 좋은 편이 아니라, 그 수업에서 뭘 배웠고 하는 게 잘 기억 나질 않는다. 하지만 대학이라는 델 들어가자마자 둘러본 강의명들 중에, 이건 꼭 들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만은 기억난다. ‘환상문학’이라는 말은 꼭 비장한 사자성어 같아서 그리도 멋져보였을까? 쉽게 말하자면 결국엔 판타지로 치환되는 이야기들에 대해 배웠다. 그 강의를 담당하던 교수님은 독어 전공이셨고, 여느 교수님이 그러하듯 그 분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도 많이 갈렸다. 하지만 나는 그저 배우는 내용도, 읽는 책도, 심지어 교수님까지도 ‘너무 좋다!’고 생각하며 오래 된 강의실 맨 앞자리를 차지했다.


그 강의를 애초에 듣고자 한 건, 당연하게도 내가 판타지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전에 그 강의를 들었던 선배들의 후기를 찾아 보면, 미하엘 엔데를 읽는다고 나와있던 까닭이었다. 나한텐 그게 엄청난 거였다. 미하엘 엔데는 ‘모모’, ‘끝없는 이야기’와 같은 아주 유명한 동화를 쓴 작가다. 나는 당연히 ‘모모’를 읽을 줄 알고 그 강의를 신청했다. 모모는 내가 어릴 적 가장 좋아하고, 말하자면 매혹되어 읽었던 책이다.


아주 작은 동네에 어느날 모모라는 정체 모를 소녀가 나타난다. 모든 동네 사람들은 이 아이와 친구처럼, 가족처럼 지낸다. 그러던 어느날 회색의 정장을 차려입은 신사들이 나타나 평화롭던 마을 사람들에게서 ‘시간’을 약탈해간다. 모모는 친구들과 힘을 합쳐 그들에게서 다시 시간을 구해오고자 모험을 떠난다.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기억 나지 않지만 어릴 적 내가 아주 좋아라했던 이야기였다. 나는 ‘대학’이라는 데서 그 책을 다시 읽으면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 똑같은 텍스트를 이제 (무려) ‘대학생(씩이나)’ 된 내가 다시 읽는다면 이전에는 보지 못 했던 새로운 것이 눈 앞에 펼쳐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스무살의 나에게 엄청난 교훈을 주며 그 후의 나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고… 기타등등. 그런 일련의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환상 문학 수업에서 말 그대로 환상을 꿈꾼 것이다.


그런데 수업에 들어가자, 이번 학기에는 커리큘럼이 바뀌었다는 교수님의 설명을 들었다. 미하엘 엔데를 읽기는 하지만, ‘모모’가 아니라 ‘끝없는 이야기’라는 그의 또 다른 작품을 읽는다는 것이었다. 천 페이지에 달하는 책이었던 것 같다. 나는 모모가 가져다 줄 환상적인 변화를 겪을 수 없어 처음에는 짜증이 일었지만 곧 다른 책에 심취했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그 책도, 아주 두껍고 아주 많은 인물들이 나오긴 하지만, 동화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수업에서 ‘동화’라는 이름을 붙인 많은 이야기들을 읽었고, 사실 그런 다정한 이름을 붙이기는 힘든 잔혹한 내용들도 많이 마주쳤다. 세상에는 멋진 책이 많이 있고, 또 읽는 것만으로도 멋진 태가 나는 책들도 많이 있다. 그치만 나는 ‘겨우’ 동화 같은 이야기들을 좋아해왔다. 스무살의 나는 현대소설이나 프랑스 고전 문학에 대한 교양 강의를 선택하는 대신에 내 취향을 따라 첫 교양 수업을 들었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대신에 ‘호두까기 인형’을 다시 읽었다. 격렬한 시대에 휩쓸려버린 위대한 사랑 이야기를 읽는 대신,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 그만 책 속으로 빨려들어간 남자 아이의 모험담을 따라갔다. 때로 아빠는 대학까지 가서 아이들이 보는 동화책을 빌려와 읽고 있는 나를 보며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누가 뭐라든, 나의 스물 봄은 동화 덕에 즐거웠다.


그런 수업을 들었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벌써 시간이 많이도 흘렀다. 동화는커녕, 그 어떤 책이건 별로 손에 못 대는 사람이 되어 메일함을 정리하다가 문득 그때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왜 나는 동화를 그리도 좋아했을까. 허무맹랑한 이야기들, 하지만 마음에 조금만 품을 내주면, 어쩌면 어딘가에서는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뛰는 이야기들.


동화는 곧잘 어딘가로 떠나는 이들의 이야기다. 공주를 구하기 위해, 혹은 공주가 되기 위해. 소중한 사람과 함께, 든든한 동물 친구와 함께, 혹은 홀로. 타고나길 용감하기 때문에, 혹은 너무나 겁이 많기 때문에 떠나는 이야기들. 나는 언제나 그런 이야기들을 사랑해왔다.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을 담아낸 이야기들. 때로는 그 사람의 여정이 그를 담은 이야기보다도 거대하고 또 길어서, 이야기는 끝나도 사실 여정은 계속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야기들. 어떤 이야기 속에서 나는 그들을 이끌기도 하고, 다른 이야기 속에서는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내 생각에 동화는 곧 여행이고 모험이다. 그래서 나는 곧잘 동화를 떠올리면 마음이 울렁거리고 또 가끔은 눈물이 시큰거리는 걸 느낀다.


어딘가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할 때 보통 ‘훌쩍’이라는 단어가 따라온다. 그렇게 훌쩍 떠나버리는 게 어딨어. 어느 밤 정말 훌쩍 떠나버렸더군. 훌쩍 떠난 후로 그에게선 소식이 없어. 그렇지만 이제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정말로 ‘훌쩍’ 떠나는 사람은, 모험가는, 방랑자는, 공주는, 기사는, 또는 아이는 없을 것이다. 떠나는 이의 짐이 설령 가벼울지라도 그이는 이미 많은 것을 짊어진 상태로 출발한다. 그래서 어디로 향하던지 떠나는 이들의 발걸음은 깊숙이 패인다. 떠나고 남겨진 자리, 떠나가 도착할 곳, 떠난 길의 도중에서 만나게 될 모든 것들은 절대 ‘훌쩍’하는 마음으로 마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건 동화를 그저 읽기만 하던 스물에는 몰랐던 사실들.


그렇기에 동화는  용기의 상징이다.  모든 것을 이고 지고도 떠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끌어내리는  모든 무게보다, 앞으로  발이라도 내딛고자 하는 의지가 훨씬  강한 사람들.  울렁거리는 마음을 떨칠 수가 없어서 모든 것을 메고도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이 떠난 여정에서 용을 만나고, 해적과 싸우고 또는 머리카락을 왕창 잃기 때문이 아니라, 떠났다는 사실 자체로 인해 그들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나는 평생 그런 것을 동경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무살의 내가 혹은  전부터의 내가 그렇게도 동화를 좋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동화 같은 모든 꿈이나 상상에서 너무나도 멀어진 지금,  사실을 새삼 떠올린다.


이상한 마음이 든다. 오래된 기억들이 떠오른다.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도. 무언가를 꿈꾸던 , 어디론가 떠나는 꿈을 꾸던 일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걸 했지?’하는 일들을   했던  같다. 가령 스물둘에 말도  통하는 곳으로 혼자  길의 여행을 떠난 것이라던지. 교수님께 당황스런 감상을 안겼을 메일을 쓰던 용기로, 그런 것들을 해낸  같다.  보고 싶은 광경과 들이마시고 싶던 공기를 경험해보려는 마음이 걱정의 중력을 떨쳐내던 기억들이 있다. 그런 기억들을 떠올리다 지금의 나를 바라보면, 나는 아주 가끔은, 아주 조금은, 슬퍼진다. 용감무쌍했던 시절로부터 나는 많은  겪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떠올릴  나는 그것이 가져다줄 기쁨보다 최악의 수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됐고, 가끔은 거기에 슬퍼한다.    병이 꼭 필요한 정도의 절망도 한다.


하지만, 어쩌면.  마음에 조금의 품이 주어진다면.

나는 동화를 동화답게 생각할  아는 특기가 있는 사람이니까. 동화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성장하듯이, 나도 그러고 있는 중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전에 겁냈던 것들을 이제는 겁내지 않는 내가  을 떠올린다. (물론 이것은 이전에 겁내지 않던 것들을 겁내게  점의 등가교환 같기는 하지만.) 이전보다  많은 일을  침착하게 해낼  아는 내가  . 이전보다  많은 세상의 일들을 이해할  있는 내가  .  모든 것이 내가 얻은 보석, 만찬, 머리카락,  다리 같은 것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이도 처음부터 ‘훌쩍떠날 수는 없다. 아무리 멋진 동화  주인공이라도 훌쩍 길을 떠난 사람은 없으리라. 오랜 동화 탐독가로서 확신한다. 하지만 모험을 떠난 이들이 대단한 것은, 여정의 어딘가에서 아주 흉하게 엎어지더라도 ‘다시 훌쩍떠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처음 떠나는 이들은 절대 가볍게 떠날  없지만,  번이라도 어딘가로 출발해본 사람은 넘어지고 나서도 다시 떠나는 법을 안다. 비로소 훌쩍.


그래서 멈추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모든 위대한 여왕과 사자와 백작과 어린아이와 기사가 그렇다. 동화에는 산만할 정도의 고저가 있고, 그것이 동화를 재미있게 한다. 넘어지고, 패배하고, 유혹 당하고, 속임수에 넘어가고, 겁에 질리고, 처음 만나는 것에 잡아먹히기 직전인 순간들이 반드시 오고, 또 많이도 온다. 하지만 그렇게 당한 후에도 다시 일어서서 훌쩍 떠나는 걸음만이 동화를 완성시킨다. 그러면서 욕을 한 마디 하든, 고상하게 치마를 털던, 머리를 다시 질끈 묶든 하는 것은 취향에 달린 일이고.


어쩌면 이모티콘으로 가득  메일을 보내는 중에도 나는 어디론가 가는 중이었을  있다. 지난 수년을 쉬지 않고 나아갔을지도 모르고, 혹은 같은 자리만 빙빙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동화는 이렇게 생겼을 수도 있다는 뻔뻔한 생각을 한다. 어쩌면, 어떤 동화는, 어떤 동화 하나 정도는 이런 이야기일  있지 않을까? 어쨌등 내가 ‘떠나기로 다짐한 라는  생각하면,   용기가 생긴다. 이뤄지든  이뤄지든 어디론가 떠나는 꿈을 꾸는 것이, 최대한 동화 같은 꿈을 꾸는 것이, 오히려 남는 일이라는  깨닫는다.


동화를 찾아 읽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아주 유구하게 해피엔딩을 좋아해왔다. 아무리 심오한 뜻이 깃들어있을지라도 나는 슬픈 결말에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아이였다. 그리곤 책을 덮어 눈을 꾹 감고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끝날 뒷이야길 내 맘대로 상상하는 아이였다. 결말 다음의 이야기. 책에선 쓰이지 않은 이야기가 분명히 더 남았으리라 믿는 마음으로 그러했다.

그러니 어디론가 떠나는 이야기가  동화라면. 나는  어지러운 발걸음을 믿고 내딛을 수도 있을  같다. 스물처럼 명랑하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나의 날들도 동화라면. 분명히 이야기는 이어지고 내가 그리는 뒷이야기가 아주 많이 남았으리라고 믿는다면. 어쩌면,  모든 것이 동화라면. 나는 또 떠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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