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제한된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UN이 발행하는 세계행복보고서에는 행복을 측정하면서“인생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사람들에게 물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다.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자유가 있다. 자유가 없는 국민도 있는가? 나는 궁금했다. 너무 뻔한 말 같았기 때문이다. 자유 대한민국에서 모든 국민은 자기 인생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자유라는 개념이 사람마다 나라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옆의 C국의 국민들은 밤새 술 마시고 놀 수 있는 게 자유라고 여기는 것 같다는 기사를 읽었다. 국가나 정부기관이 놀 수 있는 시간을 정해 주는데, 그게 늘어나면 본인들의 자유가 늘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만약 한국 어느 회사에서 점심시간을 1시간에서 2시간으로 늘려 주면 회사원들이 자유가 늘었다고 기뻐할까? 휴게 시간이 늘었다고 기뻐할 지는 몰라도 자유가 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다.
최근에 선거가 있었다. 후보들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찍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투표를 포기하거나 있는 후보들 중에서 최악을 피해 차악을 선택하는 것 뿐이었다. 내가 원하는 정치인을 뽑을 자유가 나에게 있었던 걸까? 제한된 조건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있었다. 그런데 그게 자유인가? 내 만족감을 최대화 시키려면 아마 내가 원하는 인물을 찾아서 그 사람을 설득시켜 선거에 내 보내 내가 그 사람에게 투표를 하면 될 것 같다. 나는 그걸 자기 주도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인터넷 기사에서 읽은 내용이다. 부장님과 다른 동료들과 함께, 항상 밖에서 점심 식사를 하던 어느 회사원이 시간도 아끼고 식비도 절약할 겸, 도시락을 싸 와서 먹기로 마음 먹고 그 뜻을 부장님에게 전했다고 한다. 그런데 부장님이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함께 밥 먹지 않는 것은 일종의 상사에 대한 반항이고 동료에 대한 배신이었나 보다. 그 회사원에게는 메뉴를 고를 자유도, 함께 먹을 사람을 선택할 자유도 없었다.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이 함께 밥 먹을 때, 어쩌면 상사들은 자기가 선택한 식당에서, 부하 직원들에게 메뉴를 고를 자유를 주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직원들에게 식당을 선택할 자유를 주지 않았고, 애초부터 본인과 밥 먹지 않을 자유를 주지 않았다.
갓난 아기들은 자기 욕구를 원초적으로 표현한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다고, 들어 달라고, 온힘을 다해 울어 댄다. 아기의 자유는 제한적이다. 마음대로 이동할 수도 없고 원할하게 소통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자기 욕구만큼은 자제없이 표현한다. 어린이가 되고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면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고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향상되지만, 자기 욕구에 관한 표현과 행동은 자제한다.
어느 목사님은 사춘기란 청소년이 자기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시기라고 말씀하셨다. 사회 혹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법률뿐만 아니라, 도덕과 윤리를 지켜야 한다. 어른이 되면 거기에 분위기라는 알 수 없는 뭔가가 들어있다 라는 것을 안다. “회사 분위기, 직장 분위기 때문에 점심 시간에 자기 자리에서 혼자서 도시락을 먹는 건 불가능해!”이런 분위기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 불법도 아니고 비도덕적, 비윤리적 행동도 아닌데, 하기 힘든 게 있다는 것을 안다.
내가 생각하는 자기 주도성이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내기 위해 난관을 회피하거나, 깨 부수면서 이루어고자 하는 의지다. 난관이란 타인의 편의, 관습, 관성들을 의미한다.
나는 해군을 제대했다. 어느 부사관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조개구이를 먹고 싶은 수병이 있었다. 당연히 군대 배식에 조개구이가 나올 리는 만무하고 조개구이 먹겠다고 외출이나 휴가를 신청할 수도 없다. 그래서 그 수병은 휴일에 부대 안에 있는 바다에 나가 조개를 채집해, 모래 빼고 은박지에 싸서 해변에서 불 피워 구워 먹었다고 한다. 그래도 당연히 된다. 작업 시간에 땡땡히 친 것도 아니고 조개를 잡겠다고 탈영을 한 것도 아니고 건물 안에서 불을 피워 화재 위험을 높인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 선택과 행동이 처음에 박수를 받았을까? 나는 어찌되었든 지지 받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괜한 문제 일으킬 수 있다고 여기는 지휘관리자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나 라고 생각했을 부대 내 동료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람을 조금은 특이하게 볼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 수병은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조개구이가 먹고 싶었나 보다. 나는 이 수병을 자기 주도성이 강한 사람이라 정의한다.
어떤 이도 반대하지 않는 선택은 없다. 무엇을 선택해도 본인의 선택에 반대하는 사람이 존재한다. 좋은 결과를 내었던 선례가 있다면 반대가 조금은 약해질 수 있지만 사람들은 정말 별거 아닌 분위기에 휩쓸려 사람의 선택을 제약한다. 물론 요즘에는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더욱 존중해 주는 시대이기에, 회식간 중식당에서 10명 중 9명이 자짱면을 선택할 때 자기만 짬뽕을 선택했다고 눈총 받을 일을 없을 것이다. 휴일에 조개 잡으러 부대 안에 있는 바다 나간다는 수병을 제지하는 관리자도 없을 것이다. 아마도.
누구에게나 자기 인생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 자유가 진가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자기 주도성이 강해야 한다. 자기 주도성은 그냥 의지가 강한 것일 수도 있는데, 내가 상상하는 이미지는 조금 다르다. 고통이나 훈련을 잘 견디는 것도 의지가 강한 것이다. 자기 주도성은 방법이 없거나 보이지 않을 때 그것을 계속해서 탐색해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고 지속적으로 도전해 결국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다. 남이 가르쳐 주는 방법을 꾸준히 실행하는 것이 아닌, 본인이 주도적으로 방법을 찾아 내서 해 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