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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애취애 Jun 13. 2022

생애 최초 주도적 도전의 열매

2-2 생애 최초 주도적 도전의 열매

나는 군대 제대하고 8일만에 수능시험 보고 대학에 입학했다. 내 제대일이 화요일이었는데, 그 다음 주 수요일이 수능시험일이었다. 수능 시험 공부는 군대에서 했다.


나는 꿈이 없는 사람이었다. 20살이 될 때까지 꿈이 없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남들 다 대학 가기 위해 공부하니, 그냥 했다. 물론 마음 가짐이 그러니 잘할 리는 없었다. 대학에 들어갔는데, 이제는 목표가 사라졌다. 대학 생활도 마음 들지 않았다. 수업을 빠지기 시작하자 겉 잡을 수 없었다. 이대로 아무 일도 안 하고 허송세월을 보낼 것 같았다.군대라도 다녀 오는 게 나을 것 같아, 지원 입대했다. 


모두가 힘든 군 생활,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거기서 고생을 많이 했다. 고생 속에서 든 생각이 ‘출세해야 겠다.’였다. 앞으로의 사회생활이 군대생활의 연장선이라면 이대로는 못 살겠다고 결론냈다. 그리고 출세를 위해 생각해낸 방법이 수능 시험을 다시 보는 것이었다. 20살이 생각할 수 있는 출세란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해 봐도 많이 황당한 목표였다. 제대 날짜는 11월 초순이었다. 11월 중순쯤에 수능시험이 있으니, 제대하자마자 수능시험을 바로 볼 수 있다. 수능시험 준비를 군대에서 해야 했다. 전례가 없었다. 내가 20년을 살면서 군대에서 공부해서 대학 합격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하고 싶었다. 


보통 군생활은 아침 6시부터 시작해서 저녁 9시쯤에 끝난다. 그리고 10시쯤에 잠에 든다. 2시간 일찍 일어나면, 그리고 2시간 늦게 자면 하루 4시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다행히 나의 병과는 조리병이었다. 아침 밥을 만들기 위해서 새벽에 일어나는 걸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침 준비하고 공부했다. 저녁에는 점호 끝나고 창고에 쳐박혀 공부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독학을 한들, 밖에서 학교에서 학원에서 공부하는 수험생들과 경쟁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많았다. 그때 찾은 것이 EBS 교육방송이었다. TV로 보지는 못했도 라디오로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실시간에 들을 수 없으면 테이프에 녹음해서 들었다. EBS교육방송 강의 듣고 교재 풀면서 수능준비 했다. 수학의 정석은 2번 정도 본 거 같다. EBS 교재는 1,2학기 영역별로 다 풀어보고 라디오로 국영수는 다 들었다. 한 13개월 본격적으로 준비했던 것 같다. 


목표를 위해 별에 별 짓을 다 해 본 것 같다. 처음부터 쉬는 시간에 쉬기 시작하면 나중에도 공부하지 않고 계속 쉴 것 같아서, 일병 때부터 공부했다. 당연히 눈치 보이기에 숨어서 했다. 쫄병때부터 짱박혀 공부했다. 상병, 병장 되고서는 휴식 시간이면 식당 한 켠에 조용히 앉아 공부했다.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될까 해서 아침 6시마다 라디오 “오성식의 생활영어”를 들었는데, 오성식이라는 사람이 “아침 6시에 공부하겠다고 일어나서 라디오 방송을 듣는 여러분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사람이다”라는 말에 많은 격려를 받았다. 


운동이라는 것을 처음 시작한 것도 군대에서 수능준비를 위해서였다. 나는 저질 체력이었다. 운동 센스도 빵점이었다. 초등학교 때 태권도 3개월 해 본 것 말고 운동을 배운 적도 없었다. 그런데 체력이 떨어져 집중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밥을 많이 먹는다고 해서 체력이 늘 것 같지 않았다. 할 줄 아는 운동은 뛰는 것 밖에 없어서 뛰기로 마음 먹고 시작했는데, 처음 하는 일이라 많이 긴장했던 것 같다. 그 날이 그해 석가탄신일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주도적으로 운동을 시작한 날이어서 아직도 기억이 난다. 


목표를 위해, 그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평생 처음으로 몸부림쳤던 시기였다. 제대하고 수능 시험 봤다. 내가 기대했던 점수가 나오지 않았다. 출세을 위해 법대를 가고 싶었는데, 법대갈 점수는 아니었다. 실망이 많았다. 그래도 그동안 투자한 시간과 받아 놓은 점수가 아까워, 출세는 뒤로 하고 내가 좋아하는 학문을 공부하기로 마음 먹고, 딱 1군데 대학에 원서를 냈다. 가,나,다,라군 통털어 1군데 지원했다. 그리고 떨어졌다.


충격이 꽤 컸다. 몇 주간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1년이 넘게 준비하고 수고했던 모든게 수포로 돌아갔구나.’, ‘노력에 보답은 아무것도 없고 지난 시간은 그저 추억으로 묻어야겠구나’라며 씁쓸함 이상의 좌절에 휩싸였다. 정신을 차리고 내 생활으로의 복귀를 다짐할 무렵, 대학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추가 합격자이니 등록을 하란다. 나는 예비합격자라는 게 있는 지도 몰랐다. 제대 후 8일만에 수능시험을 받던 사람이라, 빠르게 변하는 대학 입시 제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합격 여부를 알려 주는 ARS 응답 번호에 전화 한통 걸어서 불합격이라는 소리를 듣고 전화를 끊었던 게 전부였다. 예비합격순번 등은 확인도 안해 봤다. 


그 날을 기억을 한다. 토요일이었다. 그리고 대학으로부터의 전화를 받은 건 할머니였다. 외출했다가 저녁에 집에 들어가니 할머니가 “대학에서 전화”, “합격”, “등록” 뭔말인지 모르는데 이런 단어를 들었다고 했다. 어디 대학에서 온지도 모르셨다. 나는 혼란에 빠졌다. “예비합격?”, “잘못 온 전화인가?”별 생각이 다들었는데, 찾아 보니 예비 합격이라는 게 있었다. 그런데 당장 확인이 안 되었다. 토요일 저녁이니 대학에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일요일에 대학에 직접 찾아 갔는데,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예비 합격자 등록 기간은 단 하루라는데, 나는 받은 게 없었다. 합격증도 없었고, 전화도 못 받았다. 


월요일, 추가 합격자 등록 기한인 그날에 학교를 오르면서도 나는 나의 합격을 확신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른채 입학관리국에 갔고, 과사무실로 이동해 추가합격자 명단을 보고 나서야, 기쁨의 한숨인지 안도의 한숨인지 모를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런데 궁금했다. 몇 번째로 붙었는 지 궁금했다. 그래서 슬쩍 1차 추가 합격자 명단을 들추어 봤다. 3명이었다. 그 안에 내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다음 2차 추가 합격자 명단을 보았다. 2명이었다. 거기에도 내 이름이 없었다. 다음 3차 추가 합격자 명단을 보았는데 거기에도 없었다. 그리고 3차 합격차 명단 밑에는 이후 추가 합격자는 개별 통보한다고 쓰여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꼴찌로 합격했던가, 아니면 꼴찌에서 2번째로 합격한 사람이었다. 나는 합격과 불합격의 칼날 위에 섰던 사람이고 내 합격은 종이 한장의 차이로 갈렸다고 본다.


군대에서 공부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내 도전은 합격이라는 성과를 냈다. 이 일은 내 인생을 가른 큰 사건이었다. 대학의 이름이 바뀌어서가 아니다. 평생 처음으로 주도적으로 도전했던 일에서 긍정적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 경험과 이 기억은 이후의 내 삶에 엄청나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 도전을 결정해야 할 순간에 계속 이 기억이 떠올랐다. 유학을 결정할 때도, 연구에서 사업으로 커리어를 전환할 때도, 이 경험이 계속 떠올랐다. 생각이라는 건, 본인이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떠오르는 걸 막을 수 없는데, 그게 긍정적인 경험이었다. 안 될 꺼라는 생각이 들지가 않았다. 내 의지의 문제지, 환경이 변수가 될 꺼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당장 방법이 보이지 않아도 하다 보면 방법이 보일 것 같았다. 군대에서 공부하던 그때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조건이 좋은 상황에서 새 출발을 하는 것이었다. 


육아멘토 오은영이 말했다. “고등학교 수학 점수 기억나? 안나지! 그런데 하룻밤 밤새면서 공부 했던 기억은 다 있지, 사람들은 기억과 추억으로 사는 거야”그렇다. 성공의 기억이 그 다음 도전을 지지한다. 시켜서 하는 거, 해야 하니까 하는 거가 아닌, 하고 싶은 거, 주도적으로 하려고 했던 거에서 나온 성과가 다음 도전을 싶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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