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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애취애 Jul 04. 2022

어느 목사님의 달빛 행복 - 행복감도근육설

4장 행복연습 (4-5)

몇달 전, 은퇴한 어느 목사님의 예배 설교를 유튜브로 들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그분 성함을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많은 영상들이 나온다. 유명하신 분 같다. 내용도 꽤 좋았다. 설교 내용에 연륜이 묻어났다. 성경에 대한 이해도 깊으셨다. 내가 생각치도 못한 부분들을 많이 알려 주셨다. 그래서 과거의 영상들을 찾아 꾸준히 보고 있다.   


그런데 어느 설교에서 행복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행복이란 구름에 가린 달빛이 찰나에 자기를 비추고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행복은 아주 아주 가끔 찾아오는 거라고 하셨다. 그것도 찰나에 머물다가 가는 것이라 하셨다. 나는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니!, 목사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해요!” 그분의 갖고 계신 행복의 개념을 사전적 정의에 의거해 숫자로 표현한다면, 행복이란 몇 년에 한 번 75분의 1초(찰나)만 찾아왔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행복했던 시간의 합계를 내면 평생 1초도 되지 않는다. 


그 설교 메시지에 순간 나는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그분이 말하는 행복과 내가 아는 행복이 다른가? 같은 단어를 쓰는데 그 의미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는가?’, ‘내가 행복에 대한 잘못된 정의를 가지고 있나?’, ‘댓글이나 DM을 통해 행복에 대한 정의를 자세히 듣고 싶은 데 어찌하나?’, ‘목사님이 말하는 행복이 찰나라면, 현세에서 가지는 교회의 기능은 없다고 봐야 되지 않나?’등등, 혼란의 연속이었다. 설교 영상은 거의 9년전에 교회가 업로도한 것이었기에 댓글을 달아도 목사님이 직접 반응하실 것 같지는 않았다.


나 혼자만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내가 모르는 고차원의 행복 있고, 나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동그란 하늘만 보고 있었나라는 의문도 가졌다. 내가 느끼고 있는 지금의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닌가라는 의구심도 들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글귀를 보았다.


“행복이란 하늘이 파랗다는 걸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요슈타인 가아더)


이건 또 뭔말인가! 이 글귀는 사람이 너무나도 쉽게 매일 매순간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동의한다. 바람이 피부에 와 닿아 행복하고, 따스한 햇살에 감사하다. 푸른 하늘 바라보며 축복을 느낀다. 


목사님이 말하는 행복이란 무엇이었을까? 고난과 연단 끝에 오는 성장이었을까?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는 기쁨이었을까? 그 의미도 아닌 것 같다. 고난의 열매는 달아도 너무 달다. 참고 인내하며 이룬 성취의 희열은 너무 강렬해, “완전 쩔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고난과 비교하면 느끼는 행복감이 천배, 만배 이상이기에 “또 하고 싶어, 또 맛보고 싶어”라고 말하며 새롭게 도전한다.


결국, 나는 행복 차이를 사람의 기질 차이, 경험 차이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잘 우는 사람이 있고, 잘 웃는 사람이 있다. 조금만 슬퍼도 눈물샘이 터지는 사람이 있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항상 웃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슬픔과 기쁨에 반응하는 예민함이 다르다. 타고난 감각의 감도가 다른데, 울면 울수록 우는 감각이 예민해지고 웃으면 웃을수록 웃는 감각이 예민해진다. 근육처럼 쓰면 쓸수록 강해지고 커진다. 나는 “행복감도근육설”이라고 이름 붙히고 싶은데, 이거 분명 행복론에 있을 거다. 찾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연구자들이 이미 다 연구해 놓았을 거다.


목사님은 고생을 많이 하셨던 분 같다. 본인 설교에서도 종종 나온다. 그 고생이라는 건, 고달픈 인생을 산 것도 있지만, 풀리지 않은 신적 존재와 그 메시지에 대한 고뇌와 번민이다. 영적으로 예민한 신앙인으로서의 고생이다. “예수님을 만나는 게, 고난의 끝이 아니라 진정한 고난의 시작입니다.”라고 말하신 목사님 입장에서는 인생 자체가 고난이다. 그냥 고난과 더 큰 고난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거꾸로 말해도 통할 것 같다. “인생을 살아가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데, 예수님을 만나면 더 큰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고 해도 의미가 통한다고 본다. 그 이전과 이 이후의 삶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기질적 문제로 포인트가 “고난”에 맞추어진 것 같다. 


 목사님은 “자기는 젊었을 때는 고생하고 나이 들어서는 편안하게 지낼 줄 알았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인내하며 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행복하면 안 될까? 지금부터 행복하기 위한 연습을 하고, 행복을 조금씩 맛보며 그 행복을 키워 나가면 안 될까? 일상에서 작은 행복을 찾는 것, 파란 하늘을 보며 행복감을 느끼는 것부터 시작해서 행복 근육을 키워 가는 거다. 배우 차인표가 방송에서 팔 굽혀 펴기 100개 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는데, 1개를 하면 된다고 했다. 지금 1개를 하면 나중에 100개까지 는다는 의미다. 그러니 지금 행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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