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내가 특이한가? (5-4)
모든 이들의 말속에서는 주관적 의도가 들어있다고 본다. 객관적 사실의 열거도, 자기 의도를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대화를 ‘주관적 의도를 객관적 데이터로 납득시키는 행위’라고 본다.
어느 모임에 갔더니, 거기에는 모든 게 싫은 청년이 있었다. 자기 자신도 싫고 이 사회도 다 싫다고 한다. 자기 심정을 솔직하게 토로한 점을 높이 평가하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 한민족 최고의 전성기 속에서 살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 자리에서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나는 행복하고 이 사회는 아름답다.”까지만 말한다면, 그건 그냥 선언에 불과하다. 양쪽 모두 자기가 이 사회를 바라보고 있는 관점만을 확인하는 자리가 된다.
나는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를 덧붙였다.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느끼는 행복, 그 행복 하나하나를 더한 행복의 총량이란 개념이 있을 때 그 행복의 총량에 분명하게 영향을 주는 것은 소득과 건강이다. 일반적으로 월급이 오르면 오를수록 행복해지고 건강하면 건강해질수록 행복해 진다. 건강은 정량적 지표로 바꾸기 힘들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평균수명으로 대체한다. 오래살면 오래살수록 행복하다고 평가한다. 그렇게 본다면, 현대 대한민국은 한 번도 소득과 수명이 떨어진 적이 없다. 거시적 관점에서 매년 소득이 증가했고, 국민들의 평균수명은 꾸준히 늘었다. 그리고 그 추세가 계속될 것이라 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대한민국의 최전성기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한민족 최전성기다. 우리는 역사상 최고의 순간에 살고 있다.”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타임머쉰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한민족 어느 시대라도 갈 수 있다고 하자. 어느 시대에 가든 그 시대 신분의 딱 중간, 평균이 된다고 했을 때, 타임머쉰 타고 가서 살고 싶은 시대가 있는가? 나는 없다. 나는 지금 여기서 살고 싶다.”라고 덧붙혔다.
‘너의 관점이 틀리고 내 관점이 맞다. 그러니 내 말을 인정해야 하지 않냐!’라는 의도에서였다. 주관적 의도를 가지고 객관적 지표를 사용했다.
청년을 제외하고 거기에 있던 어느 누구에게도 타임머쉰을 타고 가고 싶은 다른 시대가 없었다. 청년은 “2500년전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2500년전은 단군 조선시대다. 고구려 개국 200년전이다. 그때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사료가 없어 어떤 사회였는지 알 수가 없다. 청년은 지금 이 순간이 최전성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도 모르는 시대로 가고 싶다고 했으니 말이다.
우리는 성장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과거 경제 성장률로 대충 평가해도 지금 세대는 전 세대들보다 4배 이상의 구매력을 가진다. 그리고 이제 태어나는 우리의 자녀들이 사회초년생이 될 때에는 적어도 우리보다 2배 이상의 구매력을 가질 것이다. 지금의 최저임금 월2백만원을 기준으로 보면 우리 부모 세대는 월 50만원으로 생활하는 세대였고, 우리 자녀들은 월4백만원으로 생활하는 세대가 된다.
평생 성장하는 사회에서 살았으니, 우리에게는 마이너스 개념이 없다. 성장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더 나아질꺼라는 믿음이 있다. 감사하고 소중한 믿음이다.
일본은 거시적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다. 마이너스 성장이 당연한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떨까? 세대에 따라 다를 것 같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마이너스였던 세대는 마이너스 성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매년 소득이 상대적으로 아주 약간 줄어드는데 큰 저항감이 없다.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는 세대는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다. 그분들은 일본의 전성기 살았으며 자기 자녀들이 자신들보다 더 못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손자, 손녀가 더 빈곤한 미래 사회에 살꺼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2000년은 기준으로 일본 근로자의 평균 임금은 461만엔이었다. 마이너스 성장이기 때문에 지난 20년간 그게 최고치였다. 점점 떨어져 금융위기, 동일본지진 때는 406만엔까지 하락한다. 최근에 반등해서 2019년에는 436만엔이 되었다. 그래도 2000년과 비교해, -5.5% 하락한 수치다. 이 하락이 멈출 것 같지는 않다.
더 심각한 것은 아이들의 평균 신장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는 거다. 평균 키가 줄고 있다. 2000년쯤을 정점으로 해서 17세 남녀의 평균키가 줄었다. 유전적 정점(한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다르게 본다. 키 뿐만 아니라, 체중도 줄고 있다. 17세 남녀의 평균 체중이 20년과 비교해서 약 1.5kg 줄었다. 그리고 일본인 1인당 단백질과 칼슘의 1일 섭취량이 줄고 있다. 지금의 섭취량은 1950년대 수준이다. 서구화된 식습관의 영향이라면 고기단백질과 유제품의 섭취가 늘어야 한다. 줄었다는 것은 탄수화물이나 야채 중심의 식생활로 모두 변했거나, 아니면 소득이 줄어 과거만큼 충분한 영향을 섭취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소득의 문제라면 아이들의 체중이 줄고 있는 결과도 해석된다. 한국 청소년은 키 크는 것에 비해 더 뚱뚱해지는 게 문제라면, 일본 청소년은 키도 줄고 체중도 줄고 있는 게 문제다.
어쩌면 지금 자녀를 키우는 일본 부모 세대는 자기들의 신장이 자기 자녀들보다, 그리고 자기 손주들보다 더 큰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자기 아들 딸들이 자기 키에 못 미치는 것을 보면, 그리고 자기 손주들은 그보다 더 작을 지도 모른다는 예측을 들으면, 어떤 심정일까?
살짝 국뽕이 가미된 유튜브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아버지가 일본인이고, 어머니가 한국인인 여고생 인터뷰였다. 태어나서 일본에서 쭉 살았는데 중학교 때 한국인이 되고 싶어서 한국으로 왔다고 했다. BTS가 좋고 K팝이 좋아서 한국을 선망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런 결정을 일본인 할아버지가 들었을 때, 할아버지는 울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한국과 일본의 국력차는 한 10배 정도였다. 그 차이가 메꾸어졌다. 한국이 잘 따라간 것도 있지만, 일본이 쇠락한 거다. 할아버지의 울음 속에는 많은 감정이 들어있을 꺼 같다. 일본의 전성기 때 느꼈던 자부심, 그리고 쇠퇴를 거듭하는 일본 사회를 보며 느끼는 상실감, 손녀가 일본 국적을 버렸을 때의 비통함 등,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많은 감정들이 들어 있을 꺼 같다. 거대한 흐름은 한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닐텐데,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애통하셨을 것 같다.
나는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를 보며 감사할께 너무 많다. 계속 성장할 꺼라는 믿음에 감사한다. 나는 이 성장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분명 정점을 찍고 추락하기 시작할 텐데, 그때가 내 세대에서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 자녀 세대에서도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예 안 왔으면 좋겠다.
나는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플러스 성장만을 한 축복의 시대에서 살고 있는데 이 흐름이 바뀌지 않기만을 그저 바랄 뿐이다.